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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의 숙명 Morgan Rice 마법사의 링 #3 음모, 대항책, 미스터리, 용맹한 기사들, 실연의 아픔이 가득한 사랑의 결실, 기만, 배신 등 마법사의 링은 즉각적인 흥행요소를 고루 갖춘 소설이다. 읽는 내내 즐거움이 가득하고 연령에 관계없이 누구나 매료된다. 판타지 소설 애독자라면 영구 소장도서로 추천한다. 도서 및 영화 평론, 로버트 메토스 ‘용의 숙명 (마법사의 링 제 3권) ’은 불의 바다와 용들의 터전인 안개의 섬을 배경으로 전사로 거듭나는 토르의 서사시적 모험기를 더욱 깊숙이 통찰하고 있다. 가장 뛰어난 전사들의 본고장, 극한의 장소에서 토르는 훈련을 통해 자신의 힘과 능력을 더욱 견고히 키운다. 상상을 초월한 역경을 함께 해쳐 나가며 친구들과의 우정 또한 돈독해진다. 토르와 친구들은 예상하지도 못할만한 놀라운 괴생명들을 마주한다. 백일훈련은 부대원들을 생과사의 갈림길에 처하게 한다. 수많은 목숨이 희생을 치른다. 이와 함께 꿈 속에서 마주한 아르곤과의 신비스런 대면은 계속해서 토르가 누구인지, 그의 친모가 누구인지, 자신의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과연 토르의 숙명은 무엇일까?한편, 링 대륙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된다. 캔드릭 왕자가 구금되자 그웬돌린 공주는 개리스 왕을 왕좌에서 끌어내 캔드릭 왕자와 링 대륙을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 그웬돌린 공주는 고드프리 왕자와 함께 암살자에 대한 단서를 쫓으며 두터운 남매 애를 느끼고 둘은 더욱 단결한다. 그러나 그웬돌린 공주는 암살자 추적에 열중한 나머지 도덕적 가치관과 타협해야 할 위기에 놓이고 감당하기 힘든 순간을 맞이한다. 개리스 왕은 왕조의 검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시험하고 왕이 되는 것이 무언인지를 습득하며 권력의 남용이란 향락에 빠진다. 피해망상에 젖어든 개리스 왕의 무자비한 집권은 계속된다. 암살의 배후로서 개리스 왕을 향한 올가미가 더욱 조여오고, 맥클라우드 왕가는 더욱 더 대담하게 링 대륙의 나머지 반쪽을 점령하기 시작하며 서부 왕국은 점점 더 불안정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웬돌린 공주는 애타는 마음으로 토르의 무사복귀를 염원하며 두 사람의 사랑이 계속 꽃피울 수 있길 희망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강력한 힘이 놓여있어서, 공주의 희망은 기약할 수 없다. 토르는 과연 백일 훈련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서부 왕국은 과연 붕괴될 것인가? 맥길 왕의 암살 배후는 밝혀질까? 그웬돌린 공주는 토르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리고 토르는 자신의 숙명을 깨닫게 될 것인가?‘용의 숙명’은 정교하게 설정된 배경과 등장인물을 축으로 우정과 사랑, 경쟁자와 구혼자, 전사와 용, 음모와 정치적 권모술수, 성장, 실연, 기만, 야망 그리고 배신을 다루는 장편 서사소설이며 명예와 용기, 숙명과 운명, 마법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왕들의 행군’은 연령과 성별에 구분 없이 누구에게나 영원히 뇌리에 각인될만한 판타지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첫 장부터 몰입되어 마지막 장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서론부터 액션이 가득한 빠른 전개를 자랑하는 감탄할만한 모험 소설이다. 지루한 부분을 찾아볼 수 없다. 파라노말 로맨스 길드(‘일변’ 평론)  액션, 로맨스, 모험, 긴장으로 꽉 찬 소설. 책을 손에 쥐고 다시 한번 사랑에 빠져라. vampirebooksite. com (‘일변’ 평론) 용의 숙명 (마법사의 링 연작소설 제 3권) 모건 라이스 모건 라이스 작가 소개 모건 라이스는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로 USA 투데이(USA Today) 베스트셀러 작가로 선정됐다. 저서로는 17권으로 구성된 장편 서사 판타지 연작소설 ‘마법사의 링,’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한 11권의 연작소설 ‘뱀파이어 저널(집필 중),’ 또 다른 베스트 셀러 1위인 2권의 스릴러 소설 ‘생존 3부작(집필 중)’이 있다. 이 외에도 5권의 장편 서사 판타지 연작소설인 ‘왕과 마법사(집필 중)’를 새롭게 집필 중이다. 모건 작가의 소설은 오디오 북과 인쇄 본으로 출판 됐고, 25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됐다. 모건 작가는 독자 여러분의 의견을 기다립니다. www.morganricebooks.com (http://www.morganricebooks.com)로 방문하셔서 메일 주소를 남겨주시면 무료 소설, 증정품, 무료 앱 다운로드의 혜택과 최신 단독 소식을 제공받으실 수 있으며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한 작가와의 소통이 가능합니다! 모건 라이스 작가에 보내는 찬사 “음모, 대항책, 미스터리, 용맹한 기사들, 실연의 아픔이 가득한 사랑의 결실, 기만, 배신 등 마법사의 링은 즉각적인 흥행요소를 고루 갖춘 소설이다. 읽는 내내 즐거움이 가득하고 연령에 관계없이 누구나 매료된다. 판타지 소설 애독자라면 영구 소장도서로 추천한다.” --도서 및 영화 평론, 로버트 메토스. “재미있는 서사 판타지 소설.” —컬커스 리뷰(Kirkus Reviews) “눈을 뗄 수 없는 무언가가 이 책에서 시작된다.” --샌 프란시스코 북 리뷰(San Francisco Book Review) “액션이 가득한 소설…. 흥미로운 라이스 작가의 글과 견고한 전제.” --퍼블리셔 위클리(Publishers Weekly) “기상이 넘치는 판타지….젊은 성인 시리즈물의 시작.” --미드웨스트 북 리뷰(Midwest Book Review) 모건 라이스 저서 왕과 마법사 용의 부상 (제1권) 피어나는 용맹 (제2권) 명예의 무게 (제3권) 용맹의 구축 (제4권) 어둠의 왕국 (제5권) 마법사의 링 연작소설 전사로의 원정 (제1권) 왕들의 행군 (제 2권) 용의 숙명 (제 3권) 명예의 눈물 (제4권) 영광의 맹세 (제5권) 용맹의 충전 (제6권) 검의 의식 (제7권) 수여된 무기 (제8권) 주술에 사로잡힌 하늘 (제9권) 방패의 바다 (제10권) 강철 집권 (제11권) 화마에 갇힌 땅 (제 12권) 여왕들의 규칙 (제13권) 형제들의 맹세 (제14권) 인간의 꿈 (제15권) 전사들의 마상 시합 (제16권) 전투의 선물 (제17권) 생존 3부작 연작소설 아레나 원: 슬레이버서너스(제1권) 아레나 투(제2권) 뱀파이어 저널 연작소설 일변 (제1권) 사랑 (제2권) 배신 (제3권) 운명 (제4권) 욕망 (제5권) 약혼 (제6권) 맹세 (제7권) 발견 (제8권) 부활 (제 9권) 갈망 (제10권) 숙명 (제11권) 저작권 © 2013 모건 라이스 본 전자 책은 저작권법에 의하여 보호를 받는 저작물입니다. 1976년 미국 저작권법 규정에 따라 허용 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문서의 어떠한 부분에 대해서도 무단복제와 무단전제가 금지되며 데이터베이스 또는 검색 시스템에 저장하거나 저자의 사전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본 전자 책은 개인 소장용입니다. 재판매나 무단배포는 금지됩니다. 다른 사람과 책을 공유하고자 하는 경우 각각의 추가 복사물을 구매하십시오. 직접 구매하지 않았거나 개인 소장용이 아닌 책은 반환해주시기 바라며 개인 소장용을 구입하십시오. 저자의 노력을 존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본 소설은 허구의 이야기입니다. 이름, 등장인물, 사업, 기관 명, 장소 명, 이벤트, 사건 등은 모두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산물이자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모든 이름과 생존 및 죽음에 대한 유사한 상황은 전적으로 우연입니다 Shutterstock.com.의 허가 아래 사용된 표지 이미지 저작권 Bob Orsillo 소유. 한글번역 김성희 목차 제 1장 (#u7465c101-67a1-5106-a82a-7405189c53f0) 제2장 (#u1e07aaeb-003a-5637-9df9-d7af3bae8aa1) 제3장 (#u60f3fbe9-e5a6-553f-a677-f36bc5290cd4) 제4장 (#ua03e4513-7977-5afe-b7fa-23e642bd13f1) 제5장 (#u591fc6e4-846f-5102-b37c-7413e335a718) 제6장 (#u4a4be8ea-cfe3-5d0f-a0a8-de4414a66d5d) 제 7장 (#uec144c6a-ab08-5a0d-9bea-23b93aac9e18) 제8장 (#u1de32c21-20ef-5b48-9bfe-242342bdf5a3) 제9장 (#u65bc94e9-26ba-59fb-ae80-04d9345efa95) 제10장 (#litres_trial_promo) 제 11장 (#litres_trial_promo) 제 12장 (#litres_trial_promo) 제13장 (#litres_trial_promo) 제14장 (#litres_trial_promo) 제15장 (#litres_trial_promo) 제16장 (#litres_trial_promo) 제 17장 (#litres_trial_promo) 제18장 (#litres_trial_promo) 제 19장 (#litres_trial_promo) 제 20장 (#litres_trial_promo) 제21장 (#litres_trial_promo) 제 22장 (#litres_trial_promo) 제 23장 (#litres_trial_promo) 제24장 (#litres_trial_promo) 제25장 (#litres_trial_promo) 제 26장 (#litres_trial_promo) 제27장 (#litres_trial_promo) 제 28장 (#litres_trial_promo) 제29장 (#litres_trial_promo) 제 30장 (#litres_trial_promo) 제31장 (#litres_trial_promo) “용과 용의 분노 사이에 끼어들지 말거라.”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어왕 中 에서 제 1장 맥클라우드 왕은 경사진 하이랜드 산맥을 따라 하강하며 맥길 왕가의 링 대륙으로 향했다. 그의 뒤로 수백만 명의 병사들이 함께했고, 왕은 산비탈을 전력으로 달리는 말의 고삐를 바짝 쥐고 몸을 지탱했다. 그는 허리를 세우고 채찍을 힘껏 들어올려 세차게 말의 가죽을 내리쳤다. 사실 채찍질이 필요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질주하고 있었지만, 맥클라우드 왕은 그저 동물에게 고통을 선사하길 즐겼다. 맥클라우드 왕은 눈 앞에 펼쳐진 맥길 왕가의 이상적인 마을 전경에 군침이 돌았다. 남자들이 집을 떠나 무방비 상태였고 집 안의 여자들은 무더운 여름날에 대부분의 빨래를 널고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다.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마당 앞 닭들은 자유롭게 뛰놀고 있었다. 들끓는 가마솥이 저녁이 준비됐음을 알렸다. 맥클라우드 왕은 자신이 이곳에 가할 피해, 얻을 수 있는 전리품, 농락할 수 있는 여인들을 가늠하자 입가의 미소가 번졌다. 앞으로 마을이 흘릴 피눈물을 벌써부터 음미할 수 있었다. 병사들은 계속해서 달리고 달렸다. 수많은 말들이 번개처럼 쏜살같이 전원지대에 쏟아져 나왔다. 마침내 누군가가 이들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병사를 대신 해 마을 보초를 서던 창을 든 소년이 상대편 군사들의 진입 소리에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봤다. 맥클라우드 왕은 크게 확장되는 소년의 동공을 목격했다. 그의 표정에는 공포와 두려움이 절실했다. 이런 외딴 곳에 머무르며 한 평생 전쟁이라곤 모르고 산 게 분명했다. 소년은 비참하게도 전쟁을 치를 아무런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맥클라우드 왕은 지체하지 않았다. 늘 그래왔듯 가장 선두로 상대편 적의 목숨을 앗아가고 싶었다. 그의 병사들 또한 그런 왕의 심사를 잘 헤아렸다. 맥클라우드 왕은 다시 한번 채찍을 내리쳤다. 말은 몸을 부르르 떨었고 이내 속력을 더해 앞으로 뛰어나갔다. 맥클라우드 왕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무거운 철창을 높이 들어 몸을 젖힌 뒤 있는 힘껏 내던졌다. 늘 그래왔듯 명중이었다. 소년은 몸을 돌려 달아나려던 찰나에 그대로 창을 맞았고 그렇게 창과 함께 날아온 창의 힘에 실려 날아가 나무에 꽂혔다. 소년의 등뒤로 피가 쏟아져 나오자 맥클라우드 왕은 흡족했다. 맥클라우드 왕은 짧은 환호를 질렀다. 이에 맞춰 병사들은 맥길 왕가의 비옥한 대지를 향해 앞으로 전진했다. 병사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말의 허벅지를 쓸어 내리는 노란색 옥수수 밭을 갈라 마을 초입에 다가갔다. 이 모든 걸 황폐화하기엔 날이 너무 아름답게 눈부셨고 그림 같은 전경이 너무 황홀했다. 병사들은 무방비 상태의 마을로 진입했다. 이 곳은 안타깝게도 링 대륙의 외각, 하이랜드에 너무 가까이 위치했다. 진작에 이를 간파했었어야지, 맥클라우드 왕은 이런 생각을 하며 도끼를 휘둘러 마을의 이름이 새겨진 목재 판을 부쉈다. 그는 곧 이 마을의 이름을 새로 지어줄 심산이었다. 마을 내부로 병사들이 진입하자 그들 주변으로 이 외딴 곳에 사는 아낙들과 아이들, 노인들이 비명을 외쳤다. 마을 사람들은 약 백 여명 정도였고, 맥클라우드 왕은 이곳의 모든 마을 사람들이 하나도 빠짐 없이 전쟁의 대가를 치르게 하리라 다짐했다. 맥클라우드 왕은 한 젊은 여성을 주시하며 머리 위로 도끼를 치켜들었다. 여성은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몸을 숨기기 위해 집을 향해 허겁지겁 달렸다. 왕은 그녀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 맥클라우드 왕이 던진 도끼는 그가 목표했던 대로 여성의 허벅지 뒷부분에 꽂혔고, 여자는 그대로 벌벌 떨며 넘어졌다. 맥클라우드 왕은 여성을 죽이기 보단 그저 불구로 만들길 바랬다. 몸이야 어찌됐든 후에 그녀와 즐길 생각에 목숨만은 살려둔 것이다. 맥클라우드 왕은 한눈에 그 여성을 선택했다. 길게 풀어헤친 금발 머리에 늘씬한 엉덩이를 가진 아직 18세가 채 되지 않은 소녀였다. 그녀는 이제 왕의 소유물이었다. 맥클라우드 왕이 그녀를 취한 이후, 아마도 왕은 그녀를 그제서야 죽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혹은, 목숨을 살려둘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시녀로 삼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맥클라우드 왕은 여성의 곁으로 말을 이끌며 환희의 비명을 질렀다. 이후 말에서 내려 여성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녀를 붙잡았고 땅 위에서 그녀와 뒹굴었다. 땅바닥의 충격이 온몸으로 전해졌고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기분에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다. 마침내, 삶의 의미를 되찾았다. 제2장 캔드릭 왕자는 폭풍의 눈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무기의 전당 한 가운데에서 열 두 명의 병사들과 백 명의 실버 전사들에게 둘러 쌓여, 이 불행한 상황에 함께 휩싸인 보안관장 달록을 마주하고 있었다. 달록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그는 진정 자신이 무기의 전당에서 가장 사랑 받는 왕족, 캔드릭 왕자를 그것도 그의 동료들이 함께 하고 있는 상황에서 체포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는 진정 캔드릭 왕자의 동료들이 그저 왕자가 체포되는 모습을 지켜만 보고 수긍할거라 생각했던 것일까? 달록은 캔드릭 왕자를 향한 실버 전사들의 충성심과 믿음을 크게 관과 했다. 비록 음모이지만 달록은 왕자를 체포할 합법적인 명을 받고 이곳에 왔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캔드릭 왕자는 그의 동료들이 그가 체포되는 걸 절대 가만히 두고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실버 전사들은 충성스런 삶을 살고 죽음에도 충성을 바쳤다. 이것이 실버의 신념이었다. 캔드릭 왕자 또한 다른 실버 전사 중 하나라도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했더라면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다. 어찌됐든 평생을 함께 훈련 받고 함께 싸웠기 때문이다. 캔드릭 왕자는 깊은 침묵 속에 드리워진 긴장감을 느꼈다. 실버 전사들은 왕의 병사들을 향해 자신들의 무기를 겨누고 있었고 병사들은 주춤하며 이 상황을 불편해했다. 병사들은 분명 자신들 중 누구라도 칼을 빼어 든다면 대학살이 벌어질 것을 잘 알고 있었고, 현명하게도 그 누구도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병사들은 모두 제 자리에 멈춰 보안관장, 달록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달록은 긴장한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자신의 대의가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병사들을 너무 적게 데려왔군요,” 캔드릭 왕자는 침착하게 미소를 지으며 대응했다. “왕의 병사 12명 대 실버 전사 백 명. 보안관장이 불리합니다.” 얼굴이 붉어진 달록의 안색이 안 좋았다. 그는 목을 가다듬었다. “주군, 우리는 모두 같은 왕국의 명을 따릅니다. 저는 싸울 마음이 없습니다. 주군이 옳습니다. 이 싸움은 저희에게 승리를 안겨주지 못합니다. 명령을 내리시면, 저희는 이 곳을 떠나 폐하께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나 주군께서도 개리스 왕께서 더욱 많은 병사들을 다시 보내실 거라는 걸 알고 계시지요. 제가 아닌 다른 이를 보내시겠죠. 그리고 그 모든 게 어떤 결말을 불러올지 짐작하시겠지요. 주군이 그들을 모두 죽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주군께서는 진정 병사들의 피를 손에 묻히고 싶으신지요? 진정으로 내전을 일으키고 싶으신지요? 주군을 위해 실버 전사들은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 손에 피를 묻힐 겁니다. 그러나 그게 그들에게 옳은 일일까요?” 캔드릭 왕자는 달록의 말을 되새기며 달록을 마주했다. 그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왕자는 자신 때문에 그 누구도 다치는 걸 원치 않았다. 왕자는 어떤 결과를 초래하든지 그들을 핏빛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바램을 느꼈다. 또한 그의 동생 개리스 왕자가 얼마나 엉망이든지, 얼마나 형편없는 왕이든지 상관 없이 캔드릭 왕자는 자신 때문에 내전이 발생하는 사태는 막고 싶었다. 다른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는 직접적인 대면이 항상 가장 효과적인 방법만은 아니란 걸 익히 알고 있었다. 캔드릭 왕자는 동료인 아트미에게 다가가 천천히 그의 검을 내렸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다른 실버 전사들을 바라봤다. 왕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준 실버 전사들의 행동에 깊은 감사를 느꼈다. “나의 동료인 실버 전사들이여,” 왕자가 말을 이었다. “그대들의 보호에 황송할 따름이오, 그리고 분명 그대들의 행동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라는 걸 확신하오. 모두가 나를 알고 있듯이, 나는 선왕이신 아버지의 죽음에 아무런 관련이 없소. 그리고 이 명령의 본질로써 이미 발견하게 된 용의자이자 진정한 암살자를 찾게 되면, 내가 바로 가장 처음으로 그에게 복수할 것이오. 나는 무고하오. 따라서 나는 내 자신이 내전의 발단이 되길 원치 않소. 그러니 부탁하겠소. 무기를 내려놓으시오. 난 저들이 무력으로 나를 데려가도록 허락하겠소. 링 대륙의 일원으로서 같은 일원과 싸워서는 안 되오. 정의가 살아있다면, 진실이 밝혀질 것이며 나는 그대들의 품으로 신속히 되돌아갈 것이오.” 실버 전사들은 마지못해 천천히 무기를 내려놓았고 캔드릭 왕자는 달록에게 몸을 돌렸다. 왕자는 앞으로 나서 달록과 함께 문 쪽으로 걸어가 병사들에게 포위됐다. 캔드릭 왕자는 그 한 가운데서 자랑스럽게 몸을 꼿꼿이 세웠다. 달록은 존경의 의미에서인지 또는 두려움에서인지 그렇지 않으면 캔드릭 왕자의 무고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서인지 왕자를 포박하지 않았다. 캔드릭 왕자는 스스로 감옥으로 향했다. 그러나 쉽게 모든 걸 포기해버린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무죄를 밝히고 감옥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암살자를 처형할 계획이었다. 그자가 행여 자신의 형제일지라도 말이다. 제3장 그웬돌린 공주는 왕실의 가장 깊숙한 내부에서 고드프리 왕자와 함께 손을 이리저리 꼬고 비틀며 눈 앞에 서 있는 스태픈을 바라봤다. 그는 독특해 보였다. 단지 그의 생김새가 볼품없고 허리가 휜 꼽추이기 때문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을 가득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시선을 가만 두지 못했고 마치 죄책감에 몸부림치듯 두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한 발작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리가 덜덜 떨렸으며 낮은 목소리로 스스로에게 뭔가를 흥얼거렸다. 그웬 공주는 그가 이곳에서 보낸 세월로 인해, 오랜 시간 고립되어 지낸 이유로 이러한 독특한 인상을 풍기고 알 수 없는 행동을 한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그웬 공주는 아버지께 무슨 일이 있어난 건지 그가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침착하게 기다렸다. 그러나 몇 초가 지나고 몇 분이 지나고 스태픈의 눈썹 위로 땀이 흘러내리고 그의 몸이 더욱 심하게 떨리는데도 아무런 말을 들을 수 없었다. 무겁고 깊은 침묵만이 흘렀고, 침묵을 깨는 유일함은 스태픈의 흥얼거림이었다. 그웬 공주 또한 땀이 나기 시작했다. 무더운 여름 날 펄펄 끓는 솥이 너무 가까이에 있었다. 공주는 이 상황을 빨리 마치고 이곳을 떠나 다시는 이곳에 발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공주는 스태픈을 면밀히 살피며 그의 행동을 분석하고 그의 심중을 헤아리려 노력했다. 스태픈은 공주와 왕자에게 다 털어놓겠다고 약속했음에도 아직까지 침묵만을 지키고 있었다. 그의 행동을 유심히 보니, 다른 꿍꿍이가 있는 듯 했다. 분명한 건, 그가 겁을 잔뜩 먹었고 무언가를 숨기려 한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스태픈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그날 오물 통으로 무언가가 떨어졌습니다, 확신했었죠,” 스태픈은 시선을 외면한 채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다. “그렇지만 그게 뭔지는 몰랐습니다. 금속이었죠. 우리는 오물 통을 그날 저녁 비웠고, 무언가가 강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소리가 달랐습니다. 그래서,” 스태픈은 다시 여러 차례 목을 가다듬으며 팔을 비틀거렸다. “그렇게, 그게 무엇이었든지, 강물에 휩쓸려 갔어요.” “확실한가?” 고드프리 왕자가 다그쳤다. 스태픈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웬 공주와 고드프리 왕자는 서로를 마주보며 시선을 교환했다. “그게 뭔지 대충이라도 보긴 했는가?” 고드프리 왕자가 압박했다. 스태픈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만 자네는 단검을 입에 올렸네. 보지도 못했다면서 그것이 단검이라는 걸 어찌 알았는가?” 그웬 공주가 물었다. 공주는 그가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스태픈은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말했던 건 그냥 그게 단검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스태픈이 설명했다. “그건 작은 금속이었어요. 단검이 아니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럼 자네는 오물 통의 밑부분을 확인 했는가?” 고드프리 왕자가 질문했다. “오물 통을 버린 뒤에? 아마도 그 물건이 바닥에 남았을 수도 있지 않나.” 스태픈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바닥을 확인 했습니다,” 스태픈이 대답했다. “항상 그렇게 하지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비어있었죠. 무엇이 있었든지 모두 강물에 떠내려갔어요. 모두 떠내려가는 걸 봤습니다.” “만약 그게 금속이었다면, 떠내려 갈수가 없지 않은가?” 그웬 공주가 질문했다. 스태픈은 다시 한번 목을 가다듬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강물이 참 묘합니다,” 스태픈이 대답했다. “물살이 참 세지요.” 그웬 공주는 고드프리 왕자와 의심의 눈빛을 교환했다. 고드프리 왕자의 표정으로 보아 그 또한 스태픈을 믿지 못하는 것 알 수 있었다. 그웬 공주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성급해졌다. 지금 그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황당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불과 잠시만 해도 스태픈은 모든 걸 털어놓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러나 그는 급작스레 마음을 바꿔버렸다. 그웬 공주는 스태픈에게 한발 다가갔고 무언가를 계속해서 감추려 하는 그를 노려봤다. 그녀는 가장 엄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마치 아버지에게서 느꼈던 무서운 위엄이 그녀 속에서 뿜어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주는 그가 알고 있는 전부를 밝혀야 갰다고 다짐했다. 특히 그것이 아버지의 암살자를 찾는 단서가 된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거짓을 고하고 있구나,” 공주의 어조가 강철처럼 냉정했고 그 속의 내재된 위엄에 공주 자신 또한 놀라웠다. “왕족에게 거짓을 고하면 어떤 처벌을 받게 되는지 말고 있는 것이더냐?” 스태픈은 펄쩍 뛰며 양 손을 움켜 쥐었다. 잠시 공주의 얼굴을 힐끔 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렸다. “죄송합니다,” 스태픈이 애원했다. “죄송합니다. 부탁 드립니다, 그게 다입니다.” “자네는 아까 우리에게 모든 걸 털어놓으면 감옥 행을 면해줄 수 있냐고 물었지,” 공주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자네는 아무것도 털어놓지 않았네. 아무런 얘기도 아니었다면 왜 그런 부탁을 했는가?” 스태픈은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바짝 마른 입술을 핥았다. “저…전…음,” 스태픈은 말을 꺼냈다 다시 말을 잇지 못하기를 반복했고 이내 목을 가다듬었다. “저는 걱정이 돼서요…오물 통에 뭔가가 떨어졌는데 신고하지 않은 게 걸릴까 걱정돼서요. 그게 다입니다. 죄송합니다. 그게 뭔지 몰랐어요. 이젠 사라졌고요.” 그웬 공주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주시했다. 그의 알 수 없는 행동을 파악하고 싶었다. “네 관리자에게는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공주는 틈을 주지 않고 스태픈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가 실종됐다고 들었다. 그리고 네가 그 일과 관계가 있다지.” 스태픈은 쉬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관리자는 떠났어요,” 스태픈이 대답했다. “그게 제가 아는 전부에요. 송구합니다. 공주님께 도움이 될만한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때마침 한쪽 천장에서 커다란 바람 소리가 일어났다. 세 사람 모두 고개를 돌려 활송 장치를 통해 커다란 오물 통에 오물이 내려오는 모습을 바라봤다. 스태픈은 몸을 돌려 오물 통으로 재빨리 다가갔다. 스태픈은 그곳에서 오물 통이 오물로 채워지는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그웬 공주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고드프리 왕자를 바라봤다. 고드프리 왕자 또한 난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자가 감추는 게 무엇이든지,” 공주가 입을 열었다, “저자는 절대 말하지 않을 거에요.” “저자를 투옥시켜야겠어,” 고드프리 왕자가 대답했다. “그럼 입을 열겠지.” 그웬 공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것 같지 않아요. 저자는 그렇게 해도 입을 열지 않을 거에요. 그는 분명 단단히 겁을 먹었어요. 아마도 관리자와 관련 있는 것 같아요. 그는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어요. 그렇지만 아버지의 죽음과는 관련이 없어 보여요. 제 생각엔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단서를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를 몰아세워봐야 계속 입을 닫게 할 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드프리 왕자가 물었다. 공주는 그 자리에 서서 생각에 잠겼다. 공주는 어린 시절 거짓말을 들켰던 친구 한 명을 떠올렸다. 그녀의 부모님은 그녀에게 사실을 말하라며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끝끝내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모두가 포기한 채 그녀를 내버려 둔지 겨우 일 주일 만에 그녀는 스스로 모든 사실을 털어놨다. 그웬 공주는 스태픈에게서 그때 그 친구의 모습을 투영했다. 그를 몰아세워봤자 입을 열지 않을 것이며 스스로에게 거리를 두어 그가 직접 입을 열게 해야 했다. “시간을 좀 주죠,” 공주가 대답했다. “다른 곳을 찾아봐요. 다른 단서를 찾은 뒤, 뭔가 찾게 되면 다시 그에게 물어보죠. 그럼 입을 열 거에요. 지금은 아직 준비가 안 된 듯해요.” 그웬 공주는 구석에 서서 오물 통을 주시하는 스태픈을 바라봤다. 공주는 스태픈이 자신을 아버지의 암살자에게 안내해줄 인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단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과 함께. 스태픈의 마음 속 깊숙이 도사리고 있는 비밀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공주는 그가 매우 괴상하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아주 괴상한 인물이었다. 제4장 토르는 숨을 헐떡이며 눈을 깜빡여 눈 앞을 막은 물살을 밀어냈다. 그의 눈과 코와 입 주변으로 물살이 쏟아졌다. 배에서 물길에 휩싸여 미끄러지던 토르는 마침내 목재 난간을 잡았고 안간힘을 다해 그곳에 매달려 가차없이 휘몰아치는 물살을 버텼다. 온 몸의 근육이 후들거렸고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토르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토르의 주변으로 부대원들 모두가 그렇게 물살을 버티며 고군분투했다. 매달릴 수 있는 곳에는 모두 매달려 무섭게 휩쓸어가는 물살에 저항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모두가 안간힘을 쓰며 버티고 있었다. 모든 소리가 물길에 휩쓸려 들리지 않았고 눈 앞을 바로 보기가 어려웠다. 여름 날에도 불구하고 내리는 비는 차가웠고 온 몸을 휘감는 물길은 서늘하기 그지 없었음에도 추위에 떨 수 있는 여유를 누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콜크 사령관은 마치 비의 벽 따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듯 배 위에 서서 인상을 쓰며 양 손으로 허리를 짚고 있었다. 그는 주변에 크게 외쳤다. “자리로 돌아가라!” 콜크 사령관이 명령했다. “노를 저어라!” 콜크 사령관은 스스로 자리를 잡고 앉아 노를 젓기 시작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자리에서 미끄러지고 쓸려간 부대원들이 다시 자기 자리를 찾아 돌아왔다. 토르 또한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사력을 다했고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느꼈다. 토르의 셔츠 안에 자리잡은 크론은 토르가 배 위에서 미끄러지고 다시 넘어지는 모습을 함께하며 흐느껴 울었다. 토르는 끝끝내 자리로 기어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 앉았다. “몸을 묶어라!” 콜크 사령관이 명령했다. 아래를 보니 의자 밑으로 얽히고 설킨 밧줄이 연결되어 있었고 그제서야 그 밧줄의 용도가 이해됐다. 토르는 손을 뻗어 한쪽 손목에 밧줄을 채워 의자에 노와 손목을 단단히 고정시켰다. 꽤 쓸만했다. 토르는 더 이상 미끄러지지 않았고 이내 노를 저을 수 있었다. 토르 주변으로 부대원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함께 노를 저었다. 리스 왕자 또한 토르 앞자리에 착석했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몇 분이 지나자 비의 벽의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노를 저으면 저을수록 정체를 알 수 없는 비를 맞으며 피부가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온 몸의 근육에 통증이 계속 전해졌다. 마침내 빗소리가 가벼워지기 시작했고 토르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의 세기가 약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자 하늘 위로 태양이 드리웠다. 눈앞의 광경을 가히 믿을 수 없었다. 화창하게 갠 맑은 날씨였다. 지금껏 토르가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체험이었다. 여전히 함대의 절반에 해당하는 뒷부분은 비의 벽에서 빠져 나오는 중이었고 나머지 앞 부분 절반은 마른 날의 내리쬐는 햇살을 받고 있었다. 드디어 함대 전체가 파랗고 노란 하늘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따뜻한 태양이 함대를 내리쬈다. 고요했다. 비의 벽이 빠르게 사라졌고 부대원들은 놀란 나머지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마치 다른 세계로 향하는 커튼을 걷어낸 듯한 느낌이었다. “휴식!” 콜크 사령관이 외쳤다. 토르 주변으로 부대원들이 일제히 노를 내팽개치고 숨을 고르며 탄성을 내쉬었다. 토르 또한 이들과 마찬가지였다. 온 몸의 근육이 하나도 빠짐없이 후들거렸고 쉴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했다. 함대가 새로운 물길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자 토르는 그대로 주저 앉아 숨을 고르며 욱신거리는 근육에 힘을 뺐다. 마침내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토르는 기운을 내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봤다. 함대 아래 물속을 내려다보니 물 색이 변해있었다. 밝게 빛나는 붉은빛 바다였다. 기존과는 다른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용의 바다,” 리스 왕자가 토르 뒤에서 물 속을 내려다보며 말을 건넸다. “희생자들이 흘린 피로인해 바닷물이 빨갛다고 들었어.” 토르는 바닷물 속을 바라봤다. 수면위로 거품이 일었고 깊은 곳 어디에선가 알 수 없는 괴물의 형상이 일어났다 금새 다시 가라앉았다. 형체를 확인할 만큼 오랜 시간 머물지 않았지만 토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더욱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바닷속을 관찰할만한 배짱이 없었다. 토르는 몸을 돌려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했지만 혼란스러웠다. 비의 벽을 지나자마자 나타난 이곳의 모든 것은 가히 낯설었고 괴리감이 느껴졌다. 대기 중에는 옅은 붉은 빛 안개가 머물렀고, 그런 붉은 빛 안개는 바닷물이 있는 아래쪽에도 머무르고 있었다. 수평선을 바라다보니 수십 개의 작은 섬이 포착됐다. 수 많은 섬들은 마치 수평 선 위의 징검다리처럼 보였다. 바람이 세차게 불자 콜크 사령관이 앞으로 나와 외쳤다: “돛을 올려라!” 토르는 부대원들과 함께 바로 움직였다.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도록 밧줄을 붙잡고 끌어올렸다. 돛은 바람을 싣고 항해했다. 그 어느 때보다 함대의 움직임이 빨라진 듯 했다. 함대는 섬을 향해 항해했다. 커다란 파도에 흔들거렸지만 파도가 어디서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함대는 파도의 움직임을 실었다. 토르는 뱃머리로 이동해 난간에 몸을 기대로 바다를 바라봤다. 리스 왕자가 토르 옆에 다가왔고 반대편에는 오코너가 함께 서있었다. 모두가 나란히 서서 빠른 속도로 향하고 있는 일련의 섬들을 주시했다. 세 사람은 오랫동안 침묵을 지키며 그렇게 서 있었다. 토르는 수분이 가득한 바닷바람을 쐬며 휴식을 취했다. 마침내 토르는 함대가 특정한 섬 한 곳을 향해 항해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 섬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그곳이 왕의 부대의 목적지라는 확신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안개의 섬,” 리스 왕자가 경탄하며 입을 열었다. 토르는 경외심에 섬을 유심히 관찰했다. 점점 시야에 그 모습이 잡혔다. 바위로 일구어진 험준한 불모지였고 양쪽으로 수 마일 가량 뻗어있는 길고 좁은 말발굽 모양이었다. 해안가에는 커다란 파도가 부서졌고 멀리 떨어진 함대까지도 파도가 부서지는 우르릉 소리가 들려왔다. 파도는 거대한 거품을 일으키며 바위에 부딪혔다. 바위 위로 세상에서 가장 작은 듯한 땅이 있었고 절벽은 수직으로 하늘 높이 치솟아 있었다. 토르는 함대가 어떻게 저 섬에 정박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이 정체 모를 공간에 의아함을 더해주듯, 붉은 빛 안개는 섬을 에워싸고 이슬처럼 퍼져있어 햇살에 반짝거렸다. 이 모든 게 불길한 기운을 풍겼다. 토르는 섬에서 잔혹하고 섬뜩한 기운을 느꼈다. “사람들이 말하길 저 섬은 수백만 년이나 됐대,” 오코너가 말했다. “링 대륙보다 더 오래된 섬이야. 아주 오래된 섬이지, 심지어 와일즈 왕국보다 더욱.” “저 섬은 용들의 소유물이야,” 리스 왕자의 곁에서 엘덴이 덧붙였다. 섬을 바라보고 있자니, 하늘에서 두 번째 태양이 솟기 시작했다. 그러나 순식간에 밝게 빛나던 하늘에 해가 지기 시작하며 붉은 보랏빛 노을이 일었다. 토르는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의 움직임이 빠르게 변하는 광경은 처음이었다. 이 곳에서는 태양 외에도 또 무엇이 다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섬에 용이 살고 있어?” 토르가 물었다. 엘덴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듣기로는 섬 주변에 있대. 저 붉은 안개는 용의 숨결로 만들어진 거래. 섬 주변에서 밤에 숨을 쉬면 바람에 숨결이 타고 날아와 섬을 둘러쌓는 거래.” 순간 토르는 갑작스런 소리를 들었다. 처음에는 낮은 천둥 소지 같았다. 번개처럼 길고 큰 소리에 함대마저 흔들렸다. 여전히 토르의 셔츠 안에 있던 크론은 얼굴을 파묻고 낑낑거렸다. 부대원들 모두가 흠칫 놀랐고 토르 또한 몸을 돌려 주위를 살폈다. 토르는 수평선 어딘가에서 일몰 속에 꺼져가는 불길이 검은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마치 화산 폭발 같았다. “용이야,” 리스 왕자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제 용의 터전 안에 있는 거야.” 토르는 영문을 모른 채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여기서 안전을 도모하죠?” 오코너가 질문했다. “너희들은 어디서든 안전하지 않다,” 누군가가 대답했다. 뒤를 돌아본 토르는 콜크 사령관을 보고선 깜짝 놀랬다. 양 손을 허리춤에 둔 채 부대원들 뒤에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백일 훈련의 요지다. 매일을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견디는 것. 이것은 훈련이 아니다. 용은 가까이 있으며 용의 공격을 막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다. 용이 공격할 가능성은 적다. 왜냐하면 용은 자신의 터전에 있는 보물을 지키는데 더욱 열중할 테니까. 또한 용들은 자신의 보물을 떠나있길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너희들은 용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며 밤에는 용이 내뿜는 불을 목격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용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예측할 수 없다.” 토르는 또 다시 수평선 너머로 일어나는 불길과 낮은 포효 소리를 들었다. 또한 섬에 더욱 가까이 접근하면서 바위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나는 파도를 지켜봤다. 토르는 가파르게 경사진 절벽과 바위를 주시했고, 대체 왜 저 섬의 끝없는 듯 높은 정상까지 올라야 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함대를 정착시킬만한 장소가 없어 보여요,” 토르가 말했다. “그럼 너무 쉽겠지,” 콜크 사령관이 대답했다. “그런 저 섬 위에 어떻게 가나요?” 오코너가 물었다. 콜크 사령관은 악마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헤엄쳐서 간다,” 콜크 사령관이 대답했다. 순간이었지만 토르는 콜크 사령관이 농담을 던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콜크 사령관의 표정을 보며 농담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토르는 침을 꿀꺽 삼켰다. “헤엄이요?” 리스 왕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바닷속에는 괴물들이 득실거린다고요!” 엘덴이 외쳤다. “괴물만 있으면 다행이지,” 콜크 사령관이 설명했다. “저 물살은 매우 위험하다, 저 소용돌이는 너희들을 빨아들이고, 저 파도는 너희들을 들쭉날쭉한 바위로 내팽개치겠지. 또한 바닷물은 매우 뜨겁다. 너희들이 설사 파도를 피해 저 바위를 모두 지나 섬에 당도하더라도 저 높은 절벽을 타고 마른 대지가 있는 절벽의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 헤엄치다 바다 괴물한테 잡히지 않는다면, 절벽의 정상에 이를 때까지 이 모든걸 겪어야 한다. 새로운 보금자리에 온 걸 환영한다.” 토르는 부대원들과 함께 난간 가장자리에 서서 발 아래로 거품이 이는 바닷물을 바라봤다. 발 밑의 바닷물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소용돌이를 일으켰고, 눈 깜짝할 사이에 파도가 거세게 함대를 휘몰아쳐, 흔들리는 함대 위에서 중심을 잡고 서 있기가 더욱 힘들었다. 분노한 물살은 바다를 휘저었고 붉은 물빛은 마치 지옥을 담은 듯 했다. 더욱 최악인 건, 바다 속을 가까이 들여다보자 이곳 저곳에서 바다괴물의 형상이 나타나 긴 이빨을 꽉 깨물고는 다시 깊은 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마침내 함대는 닻을 내리고 섬을 마주하며 바다 한가운데 정박했지만, 해안가와는 꽤 거리가 떨어져있었다. 토르는 긴장감에 침을 삼켰다. 고개를 들어 섬을 에워싸고 있는 바위를 바라봤고 함대에서 저 바위에 어떻게 해야 도달할 수 있을지 눈 앞이 캄캄했다. 매 순간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더욱 드세져 목청껏 소리를 질러야 서로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토르는 작은 보트 몇 대가 바다 위로 내려지는 장면을 지켜봤다. 몇몇 지휘관들이 보트를 저어 함대 밖으로 300미터 정도를 나아갔다. 부대원들을 태우기 위한 보트가 아니었다. 부대원들이 헤엄쳐 도달해야 할 보트였다. 토르는 이 모든 상황에 속이 뒤틀리는 것 같았다. “뛰어내려라!” 콜크 사령관이 명령했다. 처음으로 토르는 두려움을 느꼈다. 이러한 두려움으로 인해 왕의 부대의 일원이자 전사로서의 자격이 부족해지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전사란 자고로 어떤 상황에서든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토르는 잔뜩 겁을 먹은 스스로의 모습을 인정해야 했다. 토르는 두려워하는 스스로의 모습이 실망스러웠고, 당당한 모습으로 상황을 마주하길 바랬다. 그럼에도 토르는 두려울 뿐이었다. 주변을 살피자 자신과 똑같이 잔뜩 겁먹고 긴장한 부대원들의 모습에 토르는 안도할 수 있었다. 토르 곁의 모든 부대원들은 난간에 바짝 붙어 서서 공포에 몸이 굳은 채 바닷물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특히 한 부대원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온 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방패 훈련에서 겁을 먹었던 그 부대원이었다. 벌칙으로 훈련장을 뛰어야 했던 바로 그 부대원이었다. 콜크 사령관 또한 그 부대원의 두려움을 감지했다. 그래서인지 보트를 해당 부대원 쪽으로 이동시켰다. 거센 바람이 콜크 사령관의 머리카락을 모두 헝클어뜨렸지만 콜크 사령관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보였다. 세찬 바람에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그는 언제든지 자연에 맞서 싸울 준비가 된 듯 했다. 콜크 사령관은 두려움에 질린 그 부대원에게 가까이 다가가 인상을 깊게 썼다. “뛰어 내려라!” 콜크 사령관이 소리질렀다. “못합니다!” 겁에 질린 부대원이 저항했다. “전 못해요! 안 할거에요! 전 수영할 줄 모릅니다! 집에 데려다 주세요!” 콜크 사령관은 부대원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부대원은 난간 뒤로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콜크 사령관은 부대원의 뒷덜미를 잡아 허공으로 들어올렸다. “그렇다면 이제 수영을 배워야겠지!” 콜크 사령관이 사납게 대답했다. 토르는 두 눈을 의심했다. 콜크 사령관은 겁에 질린 부대원을 함대 아래로 던져버렸다. 겁에 질린 부대원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갈라 부글부글 거품이 이는 바닷물에 빠졌다. 커다란 첨벙 소리와 함께 물이 사방으로 튀었고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허우적거리며 헐떡거렸다. “도와주세요!” 물 속에 빠진 부대원이 외쳤다. “왕의 부대의 첫 번째 규칙이 뭐지?” 콜크 사령관이 살려달라는 부대원을 외면한 채 나머지 부대원들에게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토르는 그에 대한 답을 잘 알고 있었지만 물 속에 빠진 부대원에게 신경이 쓰여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도움이 필요한 동료를 돕는 것입니다!” 엘덴이 외쳤다. “그럼 저 부대원은 도움이 필요한가?” 콜크 사령관이 물 속의 부대원을 가리키며 반문했다. 바다 속 부대원은 물에 잠겼다 올라오기를 반복하며 물 밖으로 손을 뻗었다. 나머지 부대원들은 모두 난간 위에 서 있었다. 바닷물에 뛰어들기엔 모두 너무 두려울 뿐이었다. 그 순간 토르에게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물 속에 빠진 부대원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는 순간, 다른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토르는 더 이상 지체하지 않았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죽음의 바다, 바다 괴물, 성난 파도, 이 모든 것들이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토르가 생각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다. 토르는 난간에 올라 무릎을 구부렸고,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붉은 바닷물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공중에 몸을 던졌다. 제5장 개리스 왕은 대 연회장에서 선대 맥길 왕의 왕좌에 앉아 길고 부드럽게 조각된 원목 팔걸이를 쓰다듬으며 눈 앞의 광경을 마주했다. 웅장한 연회장 속에는 링 대륙의 곳곳에서 모여든 수 많은 군중들이 생애 최대의 행사, 개리스 왕이 운명의 검을 들어올릴 수 있을지, 그가 진정한 선택된 자인지를 직접 목격하기 위해 이곳에 모여있었다. 선대 맥길 왕이 어렸을 적, 운명의 검을 대중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들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할 기회가 없었고 따라서 그 누구도 오늘의 행사를 놓치고 싶어하지 않았다. 기대감과 흥분 감이 구름처럼 연회장을 떠도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개리스 왕은 사람들의 기대감에 무기력해졌다. 계속해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걸 바라보며, 연회장이 발 디딜 수 없을 만큼 수 많은 인파로 북적 이는 걸 바라보며, 자문위원단들의 의견을 따랐어야 했던 건지, 그들 말대로 대 연회장에서 대중을 모아 놓고 운명의 검을 들겠다는 자신의 결정이 잘못된 판단이었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자문위원단들은 개리스 왕에게 검을 보관하는 별도의 비공개 실에서 의식을 진행하길 권했다. 만약 개리스 왕이 검을 드는 데 실패하면, 단지 몇 명만이 그 사실을 목격하는 데 그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리스 왕은 아버지에게 충성했던 자문위원단들을 믿지 못했다. 또한 개리스 왕은 자문위원단들의 충고보다는 자신의 운명을 좀 더 자신했다. 따라서 왕국 전체가 자신의 위대한 능력을 직접 목격하길 바랬다. 자신이 선택된 자라는 걸 직접 확인시키고 싶었다. 그 순간을 모두의 눈 앞에 각인시키고 싶었다. 자신의 운명이 드러나는 그 순간을. 개리스 왕은 아주 우아한 모습으로 연회장에 입장했다. 자문위원단을 뒤로 대동하고 점잔을 빼며 한걸음 한걸음씩 내디뎠다. 머리 위로는 왕관을 이고 어깨에는 망토를 걸치고 두 손으로 왕권을 상징하는 홀을 들었다. 개리스 왕은 모두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아닌, 자신이 바로 진정한 왕, 맥길 가의 왕이라는 사실을 인식시키고 싶었다. 개리스 왕의 예상과 같이, 그가 이 궁궐과 백성들을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여기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 않았다. 개리스 왕은 이제 백성들이 그것을 몸소 느끼길 바랬다. 자신의 힘과 권력을 뽐내는 이 자리가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지길 바랬다. 오늘 이후, 모든 사람들이 비로소 자신이 진정으로 선택 받은 자이자 진정한 왕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왕좌에 홀로 앉아있는 개리스 왕은 연회장 한 가운데에 곧 운명의 검이 놓일 무쇠 갈래가 천장에서 내리쬐는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모습을 보자 확신을 잃었다. 이제서야 자신이 치러야 할 의식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졌다. 이젠 더 이상 뒤집을 수 없는 행보였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만일 검을 들어올리지 못한다면? 개리스 왕은 이런 생각을 애써 지웠다. 저 멀리 한쪽에서 커다란 문이 끼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러자 곳곳에서 흥분 섞인 쉿, 조용히 라는 소리가 울렸고 고조된 기대감으로 이내 연회장엔 침묵이 흘렀다. 힘이 아주 건장해 보이는 12명의 병사들이 다같이 운명의 검을 이고 그 무게를 견디기 힘든 듯 안간힘을 쓰며 연회장에 들어섰다. 건장한 병사들은 6명씩 나란히 이열 종대로 중앙에 검을 이고 아주 천천히, 한 발짝씩 내디디며 운명의 검을 연회장 내부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운명의 검이 서서히 다가오는 모습에 개리스 왕의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한 순간, 개리스 왕은 자신감을 상실했다. 이렇게 건장한 체구의 병사 12명이 함께 들고서도 힘겹게 고군분투하며 겨우 이고 있는 저 검을 어떻게 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개리스 왕은 이러한 생각을 곧 마음 속에서 지워버렸다. 어찌됐든, 운명의 검은 힘이 아닌 운명에 따라 들어올릴 수 있는 검이었다. 이내 개리스 왕은 자신이 왕좌를 지킬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은 운명에 따라 이 자리에 서 있고, 선대 맥길 왕의 장자로서 태초부터 왕위에 오를 운명을 타고 났음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개리스 왕은 군중을 둘러보며 아르곤을 찾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개리스 왕은 충동적으로 아르곤의 의견을 구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아르곤이 가장 필요한 순간이었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아르곤 외에는 다른 누구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럼에도 역시 아르곤을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했다. 마침내, 12명의 병사들이 햇살이 비치는 연회장 한 가운데에 이르렀고, 무쇠 갈래 위에 운명의 검을 어렵사리 내려놨다. 운명의 검은 금속이 부딪히는 쨍그랑 소리를 연회장 가득 울려 퍼트리며 무쇠 갈래 위에 놓여졌다. 연회장은 완전한 침묵 속에 휩싸였다. 군중들은 본능적으로 두 갈래로 나뉘어 개리스 왕이 운명의 검으로 향하는 길을 만들었다. 개리스 왕은 이 순간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군중의 관심을 만끽하며 천천히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어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개리스 왕은 다시는 이렇게 왕국 전체의 완전하고 강렬한 집중을 받는 순간이 오지 않으리란 걸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더욱 신경 썼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이 순간을 셀 수도 없이 꿈꿔왔다. 그리고 지금 그는 이 순간을 맞이하고 있다. 최대한 오랜 시간 동안 이 순간을 음미하고 싶을 뿐이었다. 개리스 왕은 모두의 시선을 흠뻑 받으며 한걸음 한걸음씩 서서히 왕좌에서 내려왔다. 발 밑에 깔린 붉은 양탄자의 감촉이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그는 그렇게 햇살이 내리쬐는 운명의 검으로 서서히 다가갔다. 걷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꿈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그는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꿈 속에서 수백만 번이나 검을 들어올린 덕에 이 양탄자 위를 걷는 자신의 모습이 익숙했다. 이 모든 것이 검을 들어올릴 자신의 운명을 말해주는 듯 했고, 지금 이 순간은 분명 운명을 향한 발걸음이었다. 그는 이 의식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었다. 위엄 있는 모습으로 운명의 검에 다가가 한 손을 뻗어 검을 쥐고 순식간에 극적으로 운명의 검을 하늘 높이 들어올릴 것이다. 군중들은 놀라움을 숨지기 못하고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선택 받은 자라고 칭할 것이다. 맥길 왕가의 가장 위대한 왕이자 영원히 링 대륙을 지배할 선택 받은 왕. 군중들은 이 모든 광경에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이고, 개리스 왕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두가 몸을 움츠리게 될 것이다. 군중들은 이러한 영광의 순간을 목격하고 선택 받은 자의 지배를 받는 시기에 태어난 것을 신에게 감사할 것이다. 군중들은 개리스 왕을 신처럼 숭배할 것이다. 개리스 왕은 운명의 검에 다가섰다. 검과의 거리는 이제 한 발짝뿐이었고 그는 마음 속 깊은 떨림을 느꼈다. 그는 내리쬐는 햇살 속으로 들어섰다. 기존에 수도 없이 검을 보와 왔음에도 불구하고 운명의 검이 내뿜는 아름다운 자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검에 가까이 다가서서 검을 바라본 건 처음이었고 스스로도 이 사실이 놀라웠다. 검은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길게 뻗어 빛을 발하는 칼날은 그 누구도 그 금속의 속성을 밝혀내지 못했으며, 검 자루는 그가 지금껏 보아왔던 검 중에서 가장 화려했다. 최고급 비단처럼 보이는 직물로 에워싸인 검 자루에는 온갖 보석이 박혀있었고 매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한 발짝 더욱 가까이 다가서자 검의 주변으로 강력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왔다. 덕분에 개리스 왕은 온 몸이 욱신거렸고 숨 쉬기가 불편했다. 이제 곧 검은 개리스 왕의 손에 쥐어지게 된다. 그는 하늘 높이 검을 치켜들 것이다. 전 세계가 볼 수 있도록 빛나는 태양 아래서 검을 들어올릴 것이다. 선택된 자, 개리스 왕, 영원한 통치자. 개리스 왕은 오른손을 뻗어 천천히 손가락으로 칼자루를 감쌌다. 온갖 종류의 보석들이 그의 손길에 전해지며 전율이 올랐다. 강력하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그의 손바닥과 팔을 거쳐 온 몸에 흘렀다. 그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힘이었다. 이 순간이야말로 자신을 위한 시간이었다. 그는 한 평생 이 순간만을 위해 존재했다. 검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나머지 한쪽 손도 함께 칼자루에 얹었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숨을 넘겼다. 신의 가호에 따라 제가 이 검을 들 수 있게 해주소서. 제게 신호를 보내주소서. 제가 진정한 왕이라는 걸 보여주소서. 제가 선택 받은 지도자라는 걸 보여주소서. 개리스 왕은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완벽한 순간을 위한 신호를 기다리며 신의 응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몇 초가 흐르고, 다시 몇 초가 흘렀지만 모든 군중이 모인 그 곳에서 신에게서는 어떠한 응답도 들을 수 없었다. 순간 개리스 왕의 눈앞에 자신을 노려보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공포에 질린 개리스 왕은 아버지의 모습을 떨치기 위해 감았던 두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요동쳤다. 끔찍한 징조가 아닐 수 없었다. 어찌됐든,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었다. 개리스 왕은 몸을 굽혀 있는 힘을 다해 검을 들었다. 그가 가진 힘은 모두 쏟아 부었고 마침내 온 몸이 바들바들 떨리며 경련이 일어났다. 운명의 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검이 아니라 지구를 들어올려야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개리스 왕은 더욱 힘을 가했고, 더욱 사력을 쏟고, 더욱 고군분투했다. 그는 한눈에도 낑낑거리며 악을 쓰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운명의 검은 한 치의 움직임도 없었다. 개리스 왕이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연회장 곳곳에서 탄성이 일어났다. 몇몇 자문 위원단들이 개리스 왕에게 달려가 그의 안위를 살폈고 개리스 왕은 공격적으로 손을 저어 그들을 물렸다. 그는 난감한 모습으로 제 발로 다시 일어섰다. 굴욕감에 사로잡힌 개리스 왕은 군중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살피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군중들은 이미 몸을 돌려 연회장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개리스 왕은 그들의 표정에서 실망감을 엿봤다. 그들의 눈에 개리스 왕은 또 다시 실패를 안겨준 왕일 뿐이었다. 이제 온 세상이, 링 대륙의 모든 사람들이 그가 진정한 왕이 아님을 알게 됐다. 그는 선택된 맥길 왕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왕위를 찬탈한 왕자일 뿐이었다. 개리스 왕은 부끄러움으로 달아올랐다. 그 어느 때보다 외로운 순간이었다. 그가 꿈꿔온 모든 것들이, 어린 시절부터 상상해온 모든 것들이 거짓이었다. 환상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스스로의 이야기를 의심 없이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스스로를 산산조각 냈다. 제6장 개리스 왕은 서둘러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속은 말이 아니었다. 검을 들어올리지 못한 스스로에게 놀랐으며 앞으로의 결과를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고민했다. 속수무책이었다. 지금껏 7대의 선대 맥길 왕들이 들어올리지 못했던 운명의 검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들어올리겠다고 생각한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왜 스스로를 선대 왕들보다 우월하리라 생각했던 것인가? 왜 스스로는 다를 것이라 여겼던 것인가? 그는 짐작했어야 했다. 좀 더 신중했어야 했다. 스스로를 과대평가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저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한 것으로 만족했어야 했다. 왜 스스로를 몰아부친 것인가? 이제 그가 선택 받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만인이 알게 됐다. 이제 그의 통치는 이에 대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 아마도 이로 인해 자신이 아버지 암살의 배후라는 확신을 더욱 심어준 셈이 된 것일 수도 있다. 개리스 왕은 이미 자신을 바라보는 모든 이의 시선이 달라진 걸 느꼈다. 모두의 시선이 그를 꼭두각시 왕으로 여긴 듯 했으며. 모두의 시선이 이미 다음 왕을 맞을 준비를 하는 듯 했다. 더욱 비참한 건 바로, 생애 처음으로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잃은 것이었다. 그는 평생토록 자신의 운명을 확신했다. 자신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하고, 링 대륙을 통치하며, 운명의 검을 들어올리는 선택 받은 자일 거라 믿었다. 이러한 그의 자만은 이제 송두리째 무너져버렸다. 이제 그는 모든 것에 확신을 잃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최악은, 검을 들어올리기 전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던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검을 들지 못한 건 아버지의 복수인 것일까? “브라보,” 어디선가 누군가가 냉소적으로 말을 건넸다. 혼자였다 생각했던 개리스 왕은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목소리의 주인공을 한번에 알아챘다. 지난 수 년간 익숙하게 들었던 그가 경멸하는 인물, 부인의 목소리였다. 헬레나. 그녀는 집무실 한쪽 구석에서 아편이 담긴 파이프를 피우며 개리스 왕을 주시했다. 아편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인 뒤 숨을 참고 다시 연기를 천천히 뱉어냈다. 헬레나 왕비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개리스 왕은 그녀가 아편 파이프를 지나치게 많아 피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뭘 하는 것이오?” 개리스 왕이 물었다. “여기 우리 집무실이잖아요,” 그녀가 대답했다. “여기선 뭐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요. 난 당신 부인이자 왕비이니. 잊지 마요. 나도 당신처럼 이 왕국을 지배하는 인물이니까. 그리고 오늘 당신의 커다란 패배로 말미암아, 지배 라는 말은 아무나 사용해도 된다고 생각하니까요.” 개리스 왕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헬레나 왕비는 언제나 개리스 왕이 가장 힘들고 상황이 부적절한 시기에 그에게 큰 타격을 줬다. 그는 이 세상 그 어떤 여인보다 자신의 부인을 혐오했다. 둘의 결혼에 동의했던 스스로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런가?” 개리스 왕이 몸을 돌려 침을 뱉고는 분노하듯 그녀에게 다가섰다. “내가 왕이라는 사실을 잊었나 본데, 아가씨, 네가 내 부인이든 아니든 왕국의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난 널 구금시킬 수 있어.” 헬레나 왕비는 조롱 섞인 콧방귀를 끼며 개리스 왕을 비웃었다. “그럼 어떻게 될까?” 헬레나 왕비가 반문했다. “네 백성들이 너의 성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을까? 아마도, 매우 그렇겠지. 그건 개리스란 인간이 계획한 일에 어긋나지. 그 누구보다 다른 이의 시선을 중시하는 남자에게는.” 개리스 왕은 헬레나 왕비 앞에 멈춰 섰다. 그녀가 언제나 자신을 꿰뚫어본다는 생각에 마음 속 깊이 심기가 불편했다. 개리스 왕은 그녀의 협박에 수긍했고 그녀와 말다툼을 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이내 깨달았다. 그런 이유로 개리스 왕은 그곳에 서서 조용히 화가 가라앉길 기다리며 주먹을 움켜 쥐었다. “바라는 게 무엇이오?” 개리스 왕은 분노를 애써 누르며 천천히 말을 걸었다. “당신은 원하는 게 있을 때만 날 찾지 않소.” 그녀는 짧게 조롱 섞인 웃음을 날렸다. “내가 원하는 게 있으면 내가 직접 가져요. 당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요. 대신 이야기 좀 하러 왔죠. 당신의 왕국 전체가 운명의 검을 들어올리지 못한 당신의 모습을 봤어요.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죠?” “우리 라니?” 개리스 왕은 그녀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해 반문했다. “이제 당신의 백성들도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됐잖아요. 당신이 패배자라는 사실이요. 당신이 선택 받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요. 축하해요. 이제 이건 공식 사실이 됐네요.” 개리스 왕은 인상을 가득 썼다. “내 아버지도 운명의 검을 들어올리진 못했소.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국을 제대로 통치하지 못한 건 아니었잖소.” “그렇지만 왕권에는 영향을 받았죠,” 헬레나 왕비가 조롱하며 맞받아쳤다. “매 순간 순간마다요.” “그렇게 내 무능력이 싫으면,” 개리스 왕은 씩씩대며 말했다. “이 곳을 왜 떠나지 않소? 날 떠나시오! 우습지도 않은 이 결혼을 끝내시오. 난 이제 왕이오. 그 누구도 더 이상 필요 없소.” “그 말을 꺼내줘서 기쁘네요,” 헬레나 왕비가 대답했다. “그게 바로 제가 이곳에 온 이유에요. 당신이 공식적으로 우리의 결혼생활을 끝내줬으면 해요. 이혼해요. 사랑하는 남자가 있어요. 진짜 남자요. 사실, 당신의 기사 중 한 명이에요. 그는 전사에요. 우린 서로 사랑해요. 진심이에요. 지금껏 만난 사람들과는 달라요. 더 이상 이 관계를 숨기지 않을 수 있도록, 이혼해줘요. 제 사랑을 공개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와 결혼하고 싶어요.” 개리스 왕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멍하니 왕비를 바라봤다. 심장에 단검이 파고드는 것만 같았다. 왕비는 왜 지금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인가? 왜 그 많은 순간 중 지금인가? 너무 버거웠다. 쓰러져 있는 자신에게 세상이 시련을 주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리스 왕이 자신이 왕비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왕비가 실제로 이혼을 거론했을 때 무언가를 느꼈다. 분노가 치밀었다. 자기도 모르게 그녀와의 이혼을 원치 않는 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만약 개리스 왕이 먼저 이혼을 거론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비가 거론했기에,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는 왕비가 손쉽게 원하는 걸 갖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무엇보다 이혼이 왕권에 어떤 영향을 줄지 알 수 없었다. 이혼한 왕이라는 사실에 수 많은 질문이 쏟아질 것이 뻔했다. 더불어 개리스 왕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왕비가 사랑한다는 전사에게 질투가 났다. 또한 자신의 면전에서 남편으로서 부족한 남성성을 지적하는 왕비에게 분노했다. 그는 앙갚음을 해주고 싶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이혼은 못해주오,” 개리스 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나에게 묶어있소. 영원히 내 부인으로 살아야 하오. 당신에게 절대 자유란 없을 것이오. 또한 내가 만약에라도 그 전사를 보게 된다면, 그를 고문하고 처형할 것이오.” 헬레나 왕비는 개리스 왕에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난 당신 부인이 아니야! 당신 또한 내 남편이 아니지. 당신은 남자가 아니야. 이 결혼은 불성실한 결합일 뿐이야. 처음부터 그래왔어. 권력을 위해 계획된 협정일 뿐이야. 이 모든 것이 역겨워. 늘 그랬어. 그리고 이것 때문에 난 진정한 결혼생활을 할 기회를 박탈당했지.” 왕비가 숨을 골랐지만 그녀의 분노는 더해졌다. “이혼을 해 줘야 할거야,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어떤 남자인지 왕국 전체에 고할 테니까. 당신이 결정해.” 이 말을 남기고 헬레나 왕비는 뒤돌아 걸어나갔다. 열려있는 방문을 나서며 다시 문을 닫는 수고도 잊었다. 개리스 왕은 석조 건물에 홀로 남아 왕비가 지나간 자리마다 울려 퍼지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온 몸에 찬 기운이 들었음에도 차마 몸을 떨 수가 없었다. 이제 그가 붙잡을 수 있는 안정적인 것이 있을까? 개리스 왕은 열려있는 방문을 바라보며 몸을 떨었다. 그는 이내 누군가 이곳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펄스가 나타나 개리스 왕은 헬레나 왕비와의 대화를 충분히 심사숙고 할 시간을 놓쳤다. 그녀의 협박을 제대로 가늠해볼 시간을 갖지 못했다. 펄스는 특유의 방정맞은 걸음걸이 대신 죄지은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집무실에 들어섰다. “개리스?” 펄스는 확신 없는 어조로 말을 건넸다.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을 주시하는 펄스를 보자 개리스 왕은 그가 얼마나 속상한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반드시 속상해야 한다고 개리스 왕은 생각했다. 어찌됐든, 운명의 검을 들라고 설득한 것도 펄스였고 자신을 능력 이상의 사람이라 헛바람을 넣은 것도 펄스였다. 펄스의 속삭임이 아니었다면, 누가 알았을까? 개리스 왕은 운명의 검을 들 시도조차 안 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개리스 왕은 분개하며 펄스에게 향했다. 그는 드디어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마땅한 대상을 찾았다. 누가 뭐라 해도,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한 사람은 펄스였다. 이 모든 상황에 처하도록 만든 사람은 바로 이 바보 같은 펄스였다. 이제 개리스 왕은 또다시 선택 받지 못한 맥길 왕가의 왕일 뿐이었다. “널 증오해,” 개리스 왕이 분개했다. “네 약속들은 지금 어떻게 됐지? 내가 운명의 검을 들어올릴 거라는 네 확신은?” 펄스는 매우 불안한 표정으로 침을 삼켰다.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정확하게,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펄스가 대답했다. “제가 틀렸습니다.” “넌 많은 걸 틀리지,” 개리스 왕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사실, 생각하면 할수록 펄스는 모든 걸 망쳐놨다. 실제로 펄스만 아니었다면, 자신의 아버지는 아직도 살아있었을 것이다. 그럼 개리스 왕은 이 엉망인 상황 속에 놓여있을 필요도 없었다. 왕권의 무게 또한 감당할 필요가 없었고 이 모든 것이 잘못 될 리가 없었다. 개리스 왕은 단순했던 과거가 그리웠다. 아버지께서 살아 계시던, 자신이 왕이 아닌 시절이 사무쳤다. 그 모든걸 다 되돌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던 그대로 되돌리고 싶었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이 모든 것을 원망할 펄스만이 눈 앞에 있을 뿐이었다.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개리스 왕은 펄스를 압박했다. 펄스는 목청을 가다듬었다. 불안한 모습이 역력했다. “저는 소문을…시중들이…떠드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폐하의 누이와 형제 분이 여기저기 파헤치고 다닌다는 이야기가 제 귀에까지 들렸습니다. 두 사람은 하인들이 일하는 곳에서 목격됐습니다. 살인 무기를 찾으려고 오물 통을 수색했답니다. 제가 폐하의 아버지를 암살할 때 사용한 단검이요.” 펄스의 한마디 한마디에 개리스 왕의 몸이 굳어갔다. 공포와 두려움이 온 몸을 마비시켰다. 이 보다 더 엉망인 하루가 있을 수 있을까? 개리스 왕은 헛기침을 했다. “그들이 뭘 찾았지?” 개리스 왕은 바짝 마른 입으로 겨우 말을 뱉었다. 펄스는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모르겠습니다, 폐하. 제가 아는 것이라고는 그 분들이 의심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리스 왕은 스스로도 믿지 못할 만큼 펄스에게 증오심이 불타올랐다. 펄스의 갈팡질팡하는 태도만 아니었다면, 무기를 제대로 처리하기만 했더라면, 개리스 왕이 이러한 상황에 처할 리가 만무했다. 펄스 덕에 개리스 왕은 속수무책이었다. “난 더 이상 같은 말을 반복하지 않을 거야,” 개리스 왕이 펄스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단호한 표정으로 펄스를 주시했다. “다시는 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 알아 듣겠나? 이 곳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말거라. 왕실 밖으로 널 좌천 보내겠다. 만약 네가 이 성안에 발을 다시 디딘다면, 널 체포할 것이다.” “당장 떠나!” 개리스 왕이 고함을 질렀다. 눈물을 가득 머금은 펄스는 뒤돌아 집무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가 오래도록 울려 퍼졌다. 개리스 왕은 다시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운명의 검을 생각했다. 스스로 큰 재앙을 초래했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 절벽으로 자신을 몰아붙인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는 자신의 추락을 직면하게 될 뿐이었다. 개리스 왕은, 아버지의 집무실 석조 바닥 위 깊게 울리는 침묵 속에 홀로 서서 온 몸을 떨며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생각했다. 이 보다 더 사무치게 외로울 순 없었다. 더 이상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이것이 왕의 자리인가? * 개리스 왕은 서둘러 원형의 석조 계단을 올랐다. 성의 가장 높은 난간을 향해 황급히 한 층 한층 올라갔다. 신선한 공기가 필요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했다. 왕국의 전망과 백성들이 잘 보이는 곳을 찾아야 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상기시켜줄 공간이 필요했다. 오늘 일어난 모든 악몽 같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그는 여전히 이 왕국의 왕이었다. 개리스 왕은 뒤를 따르는 시중들을 물리고 홀로 계단을 헐떡거리며 올라갔다. 그러다 중간에 멈춰 몸을 구부리고는 숨을 골랐다. 두 뺨에 그의 눈물이 타고 내렸다. 계속해서 매 순간마다 자신을 꾸짖는 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났다. “당신을 경멸해요!” 그는 허공에 소리쳤다. 그의 외침에 그는 분명 조롱하는 듯한 웃음소리를 들었다. 아버지의 비웃음이었다. 개리스 왕은 그 공간을 벗어나야 했다. 그는 쉬지 않고 원형 계단을 올라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다. 눈 앞의 문을 박차고 나가자 신성한 여름 공기가 그를 맞이했다. 그는 깊게 호흡을 들이마신 뒤 한참 동안이나 숨을 참으며 따뜻한 바람과 햇살을 만끽했다. 개리스 왕은 어깨에 걸친, 한때 자신의 아버지가 걸쳤던 망토를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날이 무더웠기에 더 이상 망토를 걸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석조 벽으로 이뤄진 난간의 가장자리로 서둘러 자리를 옮겨 거친 숨을 쉬며 왕국을 내려다봤다. 끝없는 인파가 성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포착됐다. 오늘 행사에 참석했다 돌아가는 인파였다. 저 수 많은 인파가 모두 자신의 통치 아래 놓여있다는 사실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갈 수 있단 말인가? “왕좌란 재미있는 것이지요,” 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란 개리스 왕이 뒤를 돌아보자 눈 앞에 아르곤이 보였다. 흰색 망토와 후드를 쓰고 지팡이를 든 채 한걸음 뒤에 떨어져있었다. 아르곤은 자신을 바라보는 개리스 왕을 바라봤다. 입가엔 미소가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미소를 찾을 수 없었다. 아르곤의 두 눈은 불처럼 이글거렸고 개리스 왕을 꿰뚫어 보며 그를 한쪽으로 몰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을 너무 많은 것을 목격했다. 개리스 왕은 아르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묻고 싶은 게 끝도 없었다. 그러나 운명의 검을 들어올리지 못한 지금 이 상황에서 그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는가?” 개리스 왕이 간절하게 물었다. “자네는 내가 선택 받은 자가 아님을 미리 말해줄 수 있지 않았나. 날 이런 수모로부터 막아줄 수 있었네.” “왜 그래야 하는지요?” 아르곤이 반문했다. 개리스 왕은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은 왕의 진정한 조언자가 아니군,” 개리스 왕이 말했다. “내 아버지에게는 진정한 충고를 했을 망정, 내겐 그렇지 않구나.” “아마도 폐하의 선왕께서는 진정한 조언을 누릴 자격을 갖췄던 거겠죠,” 아르곤이 대답했다. 개리스 왕의 분노가 더욱 깊어졌다. 그는 아르곤을 증오했다. 그리고 그를 원망했다. “자네가 내 주변을 맴도는 걸 원치 않는다,” 개리스 왕이 말했다. “왜 선왕께서 자네를 곁에 두었는지 모르겠구나, 네가 왕국에서 떠나길 바란다.” 아르곤은 공허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웃음을 터뜨렸다. “선왕께서 절 곁에 두신 게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여,” 아르곤이 설명했다. “선왕의 선왕도 아니지요. 저는 이곳에 있어야 하는 운명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사실, 제가 그분들을 곁에 두었다고 정정해야겠지요.” 순간 아르곤은 개리스 왕 앞으로 바짝 다가가 그의 영혼을 꿰뚫어 보듯 그를 주시했다. “폐하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르곤이 물었다. “폐하는 이곳에 있을 운명인가요?” 아르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개리스 왕의 신경을 강타했고, 개리스 왕은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르곤이 던진 질문이야말로 개리스 왕 스스로가 궁금해했던 것이었다. 개리스 왕은 지금 아르곤이 자신을 위협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피로써 대위를 잇는 자는 피로써 지배한다,” 아르곤은 이 말을 남긴 채 뒤돌아 걸어갔다. “기다리시오!” 개리스 왕이 소리쳤다. 아르곤이 사라지지 않길 바랬다. 그의 답이 필요했다. “그게 무슨 뜻이오?” 개리스 왕은 아르곤이 자신에게 오랜 시간 통치하지 못할 거라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라 여겼다. 아르곤이 정말 그런 의미로 자신에게 그런 말을 남긴 건지 확인해야 했다. 개리스 왕은 아르곤을 쫓아 달려갔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자 아르곤은 눈 앞에서 사라졌다. 개리스 왕은 주변을 둘러봤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는 공허한 웃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아르곤!” 개리스 왕지 다시 외쳤다. 개리스 왕은 다시 몸을 돌려 하늘 위를 바라봤다.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머리를 뒤로 젖히며 그는 사력을 다해 외쳤다: “아르곤!” 제 7장 에레크 명장은 공작과 브랜디트와 나란히 북적 이는 사바리아의 길을 걸었고 그들 뒤로는 수십 명의 수행단이 따랐다. 그들이 시녀의 집을 향해 거리로 나오자 그들을 보기 위한 인파가 더욱 거세졌다. 에레크 명장은 지체 없이 바로 그녀를 만나고 싶다고 고집했고 공작은 직접 에레크 명장을 시녀에게 안내하겠다고 했다. 공작이 나서는 길을 따라 군중들이 뒤를 이었다. 에레크 명장은 뒤를 잇는 수 많은 군중들을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고 한편으로는 수많은 구경꾼들을 대동하여 그녀의 집에 당도하게 되리란 생각에 꽤나 민망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부터 에레크 명장은 몇 가지 질문에 사로잡혔다. 그 여인은 누구인가, 기품이 흘러 넘치는 데도 불구하고 백작의 성에서 시녀 일을 하는 연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왜 내 눈앞에서 그렇게 급하게 사라졌던 것인가? 지난 세월 동안 수 많은 귀족 여인들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 여인만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인가? 한 평생을 왕족과 함께하며 왕의 후손으로 대접받은 덕에 에레크 명장은 한눈에 다른 이의 기품을 알아봤다. 그렇기에 에레크 명장은 그 여인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가 지금 하는 일과는 달리 좀 더 지체 높은 신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이 곳에서 무얼 하는 것인지 알고 싶은 마음에 안달이 날 정도였다. 그는 다시 한번 두 눈으로 그녀를 보고 싶었다. 자신이 그저 멋대로 상상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생각이 맞는 건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의 시중이 말하길 그녀는 도시의 외각에 머물고 있다고 하네,” 에레크 명장과 함께 걷던 공작이 설명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동시에 길가에 위치한 모든 집집마다 창문이 열리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내밀었고 모두가 평민이 사는 동네에 공작과 그의 수행원들이 등장한 까닭을 궁금해 했다. “듣자 하니, 여관 주인의 하녀로 있다더군. 그녀의 출신이 어디인지, 어디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네. 알아낸 것이라고는 그녀가 어느 날 이 도시로 왔고, 계약을 맺어 여관 주인의 하녀가 됐다는 것이네. 그녀의 과거는, 보아하니 불분명하네.” 일행은 또 다른 길로 들어섰다. 바닥에 깔린 자갈이 거칠었고 걸어 갈수록 보잘것없는 작은 집들이 더욱 밀집되어 붙어 있었다. 공작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나는 이번 특별한 행사를 맞이해 그녀를 내 궁전의 시녀로 들인 걸세. 그녀는 조용하고 자신의 얘기를 하지 않는다고 하네. 그 누구도 그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네. 에레크 명장,” 공작이 에레크 명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고 한 손으로 명장의 손목을 잡았다. “정말로 이 일에 확신이 있는가? 이 여인이, 누구이던 간에, 그녀는 그저 평민일 뿐일세. 자네는 왕국의 어느 여인이든 아내로 삼을 수 있지 않은가.” 에레크 명장은 이전과 같은 강렬한 표정으로 공작을 마주했다. “저는 이 여인을 꼭 다시 봐야겠습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상관 없습니다.” 공작은 어쩔 수 없는 에레크 명장의 고집에 고개를 저었고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들은 이리저리 놓여있는 길을 걷고 좁은 모퉁이를 돌고 돌았다. 길을 따라 걸어갈수록 사바리아의 거리는 더욱 지저분해졌고 술 취한 취객들이 곳곳에 가득했으며 이곳 저곳으로 오물과 함께 닭들과 들개들이 떠돌고 있었다. 공작 일행은 여관을 지나 또 다른 여관을 지나쳤다. 거리 위로는 길가는 행인의 비명소리도 들려왔다. 이들 앞으로 몇몇 술주정뱅이들이 비틀거리며 걸어 다녔고 어둠이 깊어져 횃불만이 길을 밝혀 주었다. “공작님 행차이시니라!” 앞서 길을 안내하는 하인이 서둘러 술주정뱅이들을 밀치며 외쳤다. 거리 곳곳마다 불결해 보이는 길들이 이리저리 나뉘어져 있었고 에레크 명장과 함께 하는 공작의 일행을 본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그들의 행렬을 지켜봤다. 마침내 공작 일행은 작고 초라한 여관 앞에 도착했다. 외부는 벽토가 발려 있었고 경사진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건물이었다. 일 층 주점은 대략 50여 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는 규모였고 이층에는 숙박객을 위한 객실 몇 개가 전부였다. 입구는 기울어져있었고 창문 하나는 유리창이 나가있었다. 입구에 달아놓은 램프가 삐뚤어져 횃불이 깜박거렸다. 공작 일행이 입구 근처로 다가서자 창문 밖으로 술 취한 취객들의 고성이 울려 퍼졌다. 그토록 기품이 넘치는 여인이 어찌 이런 곳에서 일을 한단 말인가? 안에서 울려 퍼지는 고성과 야유 소리에 개탄한 에레크 명장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가 이곳에서 겪을 고초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이건 옳지 않다, 라고 명장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를 이곳에서 반드시 빼내오리라 다짐했다. “신붓감을 찾기에 가장 최악인 장소를 찾은 이유가 무엇인가?” 공작이 에레크 명장을 바라보며 이야기 했다. 브랜디트 또한 에레크 명장을 바라봤다. “이게 마지막이네, 친구,” 브랜디트가 입을 열었다. “궁전에는 아직 자네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여인들로 가득하네.” 그러나 에레크 명장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렀다. “문을 여시오,” 에레크 명장이 명령했다. 공작의 시중 하나가 앞으로 달려와 여관 문을 활짝 열었고 그와 동시에 오래된 술 냄새가 퍼져 나와 시중은 얼굴을 찌푸렸다. 내부에는 술 취한 취객들이 바에 엎드려 있었고, 목재 의자에 걸터앉은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큰 소리로 서로 조롱을 퍼붓고 이리 저리 밀치고 있었다. 인생을 막사는 사람들이라는 걸 에레크 명장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산처럼 튀어나온 배와 얼굴에는 깍지 않은 무성한 수염, 세탁하지 않은 옷을 걸친 주정뱅이들이었다. 그 누구도 전사의 기량을 가진 자는 없었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를 찾기 위해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와 같은 여인이 이런 곳에서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곳이었다. 혹시 잘못 찾아온 게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실례합니다, 선생님, 저는 한 여인을 찾고 있습니다,” 에레크 명장이 옆에 서 있던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사내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배는 산처럼 솟아 있었고 얼굴은 수염을 깎지 않아 덥수룩했다. “아니 그럼 당신은?” 사내는 조롱하듯 소리를 크게 외쳤다. “그럼, 잘못 찾아왔소! 여긴 사창가가 아니야. 사창가는 저기 길 건너에 있지. 거기 여인들이 꽤나 실하고 포동포동 하다더군!” 사내는 에레크 명장의 면전에 대고 거슬릴 만큼 큰 소리로 웃어대기 시작했다. 사내의 친구들 또한 사내와 함께 웃어댔다. “제가 찾는 건 사창가가 아닙니다,” 언짢아진 에레크 명장이 대답했다. “한 여인을 찾고 있어요, 여기서 일하는.” “여관 주인의 하녀를 찾는 거군,” 거구의 술 취한 한 사내가 저 멀리서 대답했다. “아마 저 뒤에서 바닥을 닦고 있을 거요. 안됐지, 여기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 무릎 위에!” 술집에 있던 모든 사내들이 사내의 농담에 정신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에레크 명장은 그러한 생각만으로도 화가 치밀었다. 그녀에게 부끄러웠다. 그녀가 이러한 형편없는 사내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경멸스러웠다. “그쪽은 뉘신지요?” 멀리서 다른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다른 사내들보다 눈에 띄게 체구가 건장하고 짙은 수염에 짙은 눈빛을 지닌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얼굴 가득히 인상을 쓰고 단단한 턱이 눈이 뛰었다. 그는 지저분해 보이는 여러 명의 사내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그는 근육이 가득한 거구로 에레크 명장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갔다. 분명한 시비였다. “내 하녀를 뺏어가려는 거요?” 사내가 말했다. “그럼 한번 겨뤄보시지!” 사내는 더욱 가까이 다가가 에레크 명장의 멱살을 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오랜 훈련을 수행한 왕국 최고의 전사인 에레크 명장은 사내가 상상조차 못한 반응을 보여줬다. 사내가 에레크 명장에게 손을 대려는 순간, 명장은 순식간에 그의 손목을 쥐고 번개처럼 사내를 뒤집어 그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저 멀리 날려버렸다. 거구의 사내는 마치 포탄처럼 날아가 주변에 있던 무리들과 섞여 볼링 핀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두 사람에게 시선이 집중되며 술집은 적막에 휩싸였다. “싸워라! 싸워라!” 취객들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정신을 못 차리던 여관 주인은 고함을 외치며 에레크 명장에게 달려들었다. 에레크 명장은 더 이상 인내하지 않았다. 명장은 앞으로 나서 한쪽 팔을 들어 팔꿈치로 여관 주인의 얼굴을 가격해 코뼈를 부러뜨렸다. 여관 주인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치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레크 명장은 여관 주인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켜 세운 뒤 거구의 체격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명장은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가 치켜 든 여관 주인을 허공으로 던졌고 여관 주인은 그렇게 허공을 갈라 바닥에 내팽개쳐졌다. 술집에 있던 모든 사내들이 이야기를 멈추고 그대로 굳었다. 적막이 흘렀고 모두가 에레크 명장이 예사 인물이 아니란 걸 알아챘다. 순간 술집의 바텐더가 술병을 머리 위로 들고 민첩하게 에레크 명장을 향해 달려들었다. 급습을 간파한 에레크 명장은 이미 검을 뽑기 위한 준비를 했으나 명장이 검을 채 뽑기도 전에 브랜디트가 앞으로 나서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 달려오는 바텐더의 목을 겨눴다. 바텐더는 자신을 겨눈 단검 앞에서 그대로 굳었다. 조금만 더 움직였더라면 칼날이 살을 파고들었을 게 분명했다. 바텐더는 그렇게 공포에 질려 눈을 부릅뜨고 땀을 흘리며 한 손에는 병을 쥐고 멈춰있었다. 그렇게 술집 안은 침묵이 흘렀고 너무나 고요해 저 멀리서 못이 떨어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병을 내려 노시오,” 브랜디트가 명령했다. 바텐더는 브랜디트의 말에 따라 술병을 바닥에 던졌다. 에레크 명장은 칼날이 칼집에 부딪히는 금속 소리와 함께 검을 빼 들어 여관주인에게 다가갔다. 여관 주인은 여전히 바닥 위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고 명장은 그의 목에 칼끝을 겨눴다. “두 번 이야기하지 않겠다,” 에레크 명장이 입을 열었다. “여기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거라. 당장. 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길 바란다. 단 둘이서.” “공작이다!” 누군가가 외쳤다. 술집의 모든 사람들이 공작이 있는 쪽을 바라봤고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술집으로 들어서는 공작을 한눈에 알아봤다. 모두가 서둘러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예를 갖췄다. “내 말이 끝나기 전에 이곳을 나가지 않는다면,” 공작이 말을 이었다. “여기 남은 모든 자를 구금할 것이다.” 순식간에 술집은 광란에 빠졌다. 술을 마시던 사내들은 일제히 서둘러 입구 앞에 서있는 공작을 지나쳐 술집 밖으로 빠져나갔다. 마시던 술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자네도 나가시게,” 브랜디트가 겨누던 칼끝을 내리고 바텐더의 머리를 붙잡아 술집 밖으로 내던지며 말했다. 소란스러웠던 실내가 이제는 고요해졌다. 술집에는 여관주인을 비롯해 에레크 명장, 브랜디트, 공작과 열 두 명의 공작 수행원이 남아있었다. 수행원들은 철커덩 소리를 내며 술집 문을 내렸다. 에레크 명장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며 바닥에서 코피를 닦고 있는 여관 주인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고 여관 주인을 그의 뒤에 있는 벤치 위에 앉혔다. “당신이 내 장사를 망쳤소,” 여관 주인이 불평했다.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오.” 공작이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혀 여관 주인을 마주봤다. “자네가 이 젊은이에게 손을 대려 한 것만으로도 난 자네를 처형할 수 있네,” 공작이 여관 주인을 책망했다. “이 사람이 누구인 줄 아는가? 에메크 명장일세, 왕의 최정예 기사이자 최고의 실버 전사이지. 에레크 명장이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자네를 없앨 수 있네.” 여관 주인은 고개를 들어 에레크 명장을 바라봤다. 그는 처음으로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을 지었고 제 자리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제가 몰라봤습니다. 뉘신지 말씀을 안 해주셨잖아요.” “그녀는 어디 있는가?” 에레크 명장은 급한 마음에 여관 주인을 다그쳤다. “저 뒤에서 주방을 청소하고 있습니다. 제 하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요? 뭘 훔치기라도 했나요? 쟤는 그저 제가 고용한 하녀일 뿐입니다.” 에레크 명장은 단검을 꺼내 여관 주인의 목을 겨눴다. “다신 한번 그녀를 ‘하녀’라고 불러보게,” 에레크 명장이 경고했다. “그럼 네 목을 잘라버리겠네. 알겠는가?” 명장이 여관 주인에게 칼끝을 겨누며 단호하게 명령했다. 여관 주인은 울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서둘러 이곳으로 데려오거라,” 에레크 명장이 여관 주인의 발을 차며 뒷문 쪽을 향해 그의 등을 떠밀었다. 여관 주인이 서둘러 자리를 떠나자 주방 쪽에서 그릇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고 소리 없는 다그침이 들려왔다. 얼마 후, 주방 문이 열렸고 보잘것없는 넝마로 만든 원피스에 주방 기름을 잔뜩 묻힌 하녀 여럿이 걸어 나왔다. 60대쯤으로 보이는 세 명의 여성이었다. 에레크 명장은 자신이 말한 여인이 누구인지 여관 주인이 알긴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곧, 세 명의 하녀 뒤로 그녀가 뒤따라 걸어 나왔다. 순간 에레크 명장은 심장이 멎는 듯 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가 찾던 그녀였다. 기름때가 가득 묻은 앞치마를 두른 그녀는 고개를 들기가 부끄러운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머리는 뒤로 묶어 천으로 감싸여 있었고 양 볼은 그을음이 묻어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에레크 명장은 그녀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의 피부 결은 아이처럼 티없이 맑았다. 뺨이 높고 턱이 가늘며 작은 코 위로는 주근깨가 보였고 입술은 도톰했다. 넓고 기품 있는 이마 위로 아름다운 금발 머리가 보닛 밖으로 빠져 나왔다. 그녀는 잠시 에레크 명장을 힐끗 바라봤고 그 덕분에 보석같이 아름다운 엷은 황록색 눈동자가 불빛에 비춰 크리스탈 푸른 빛으로 반짝였다. 이 모습을 바라본 에레크 명장은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에레크 명장을 지금 이 순간 그녀를 처음 봤던 그 때보다 더욱 그녀에게 매료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뒤로 여관 주인이 인상을 쓰며 여전히 흐르는 코피를 닦으며 걸어 나왔다. 그녀는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와 에레크 명장 앞으로 먼저 나와있던 노년의 여성들에게 둘러 쌓였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가 가까이 다가오자 무릎을 구부려 인사를 건넸다. 공작이 대동한 수행원들과 함께 에레크 명장은 그녀 앞에 다가가 그녀를 마주봤다. “주군,” 그녀의 부드럽고 달콤한 음성이 에레크 명장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제가 주군께 어떤 무례를 저질렀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엇이든 제가 공작님의 궁궐에 들어가 주군께 실례를 범한걸 용서해 주십시오.” 에레크 명장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어투와 어조, 음색을 듣자 마음이 놓였다. 그녀가 끊임 없이 속삭여주길 바랬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에게 다가가 그녀와 눈을 맞추기 위해 부드럽고 자상하게 그녀의 턱을 치켜 세웠다.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니 심장이 요동치는 듯 했다. 푸른 빛 바닷물 속에서 길을 잃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가씨, 아가씨가 제게 무례를 범한 건 없습니다. 아가씨가 결코 제게 무례를 범할 일을 없을 듯 합니다. 저는 누군가를 질책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닙니다, 사랑에 끌려 왔습니다. 아가씨를 본 순간부터 아가씨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아래로 옮겼고 몇 번이나 눈을 깜박거렸다.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듯 그녀는 양 손을 이리저리 잡아당겼다. 분명 이런 일이 처음인 듯 보였다. “말해주십시오, 아가씨. 성함이 어찌 되시나요?” “알리스테어 입니다,” 그녀의 어조가 겸손했다. “알리스테어,” 그녀의 어조에 압도당한 듯, 에레크 명장은 그녀의 이름을 되새겼다. 그가 들어본 이름 중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그러나 저는 왜 주군께서 저를 궁금해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부드러운 음색으로 말을 이었다. “주군께서는 귀족이십니다. 허나 저는 하녀일 뿐입니다.” “내 하녀지요, 정확히 말하자면,” 여관 주인이 앞으로 나서며 심술궂게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쟤는 저에게 고용됐습니다. 계약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몇 년 전에요. 7년 동안 하녀로 일하기로 약속했지요. 그 대가로 저는 음식과 머물 곳을 제공하고요. 이제 삼 년 지났습니다. 그러니 보시다시피 시간 낭비 하시는 겁니다. 쟤는 제 소유물입니다. 제 하녀에요. 주군께서는 데려가실 수 없습니다. 제거니까요. 아시겠습니까?” 에레크 명장은 그 동안 그 누구에게도 품지 않았던 경멸감을 여관 주인에게 품었다. 한편으로는 당장이라도 검을 꺼내 여관 주인의 심장을 찔러 이 자리에서 그를 없애고 그와 그녀의 계약관계를 종료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그 자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든 상관없이, 에레크 명장은 왕의 법규를 어기고 싶지 않았다. 어찌됐든, 에레크 명장의 행동 하나하나가 왕권을 반영했기 때문이었다. “법은 법이지,” 에레크 명장이 단호하게 여관 주인에게 대답했다. “법을 어길 생각을 없네. 다만, 내일 마상경기가 열리네. 여느 사내들과 같이 그곳에서 우승하면 난 내 신부를 고를 수 있지. 그리고 난 알리스테어 아가씨를 선택하겠다고 미리 말해두겠네.” 술집 안에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말을 잇지 못한 채 서로의 얼굴만 바라봤다. “그건,” 에레크 명장이 말을 이었다. “ 만약 이 아가씨가 허락을 해 준다면 말일세.” 에레크 명장은 알리스테어를 바라봤다. 여전히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그녀의 모습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의 시선에 수줍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아가씨?” 에레크 명장이 물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순간이었다. “주군,” 알리스테어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주군께선 제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이곳에 왜 왔는지 알지 못하십니다. 송구스럽지만 전 이 모든 것들을 주군께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에레크 명장은 알리스테어를 바라보았다. “왜 말해줄 수 없는 것이오?” “이곳에 온 이후로 그 누구와도 제 얘기를 나눈 적이 없습니다. 맹세를 했지요.” “그렇지만 왜요?” 에레크 명장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알리스테어를 재촉했다. 그러나 알리스테어는 말 없이 고개를 떨굴 뿐이었다. “사실입니다,” 나이 많은 하녀가 대신 대답했다. “이 아이는 자신이 누구인지 한번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또는 왜 이곳에 왔는지 도요. 대답을 안 해요. 지난 몇 년간 계속 물어봤었는데도요.” 에레크 명장은 그녀의 이야기에 크게 당황했다. 결국 알리스테어에 대한 의문만 커질 뿐이었다. “만일 아가씨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면, 굳이 묻지 않겠습니다,” 에레크 명장이 말했다. “아가씨의 맹세를 존중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가씨에 대한 제 마음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아가씨, 당신이 누구이든 제가 내일 개최되는 경기에서 승리한다면 우승의 대가로 아가씨를 선택하겠습니다. 이 왕국 전체에서 그 누구도 아닌 아가씨를요. 다시 한번 여쭈겠습니다. 허락 해주시겠습니까?” 에레크 명장은 시선을 떨구고 있는 알리스테어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녀의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간 그녀는 뒤돌아 주방을 향해 술집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들어왔던 문으로 급하게 나간 뒤 등뒤로 문을 닫아버렸다. 에레크 명장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영문을 몰라 말을 잇지 못했다. 에레크 명장은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봤지요, 시간만 낭비했군요, 쟤는 제겁니다.” 여관 주인이 입을 열었다. “쟤는 싫다고 했습니다. 이제 나가세요.” 에레크 명장을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싫다고 말한 적이 없네.” 브랜디트가 끼어들었다.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지.” “그녀는 시간이 필요한 것일 거요,” 에레크 명장이 알리스테어를 변호했다. “누가 뭐라 해도 심사 숙고해야 할 일이니까. 그녀는 또한 날 잘 알지도 못하지 않소.” 에레크 명장은 그 곳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오늘밤 이곳에서 머물겠네,” 에레크 명장이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자네는 내게 방 하나를 내주시게, 그녀의 방 가까이로. 내일 아침 경기 시작 전에 그녀에게 다시 한번 허락을 구해볼 것이네. 그녀가 허락하고 내가 우승한다면, 나는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거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자네가 그녀와의 노예계약을 파기하도록 자네에게 돈을 지불하고 그녀와 함께 이곳을 떠나겠네.” 여관 주인은 한눈에 봐도 에레크 명장이 하룻밤을 그의 여관에서 보낸다는 사실에 불만이었지만 감히 그를 거절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빠르게 주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등뒤로 문을 쾅 하고 닫아버렸다. “정말 이 곳에 머무를 생각인가?” 공작이 물었다. “우리와 함께 궁전으로 돌아가게나.” 에레크 명장은 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 저었다. “제 생에 이보다 더 확신을 가진 일은 없습니다.” 제8장 토르는 허공을 갈라 얼굴을 수면으로 향하고 휘몰아치는 불의 바다 속으로 다이빙했다. 바닷물 속으로 깊이 잠수한 토르는 이내 수면 위로 고개를 들었고 뜨거운 바닷물의 감촉을 온 몸으로 느꼈다. 토르는 잠시 바닷물 속을 들여다봤고 이내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알 수 없는 온갓 종류의 크고 작은 괴상한 생김새의 바다 괴물이 시야 속에 들어왔다. 바다 생물로 가득한 바다였다. 보트로 안전하게 이동할 때까지 바다 괴물의 공격이 없기만을 간절히 기도했다. 토르는 다시 수면 위로 올라 숨을 들이쉬며 물에 빠진 부대원을 찾았다. 때마침 물에 빠진 부대원이 허우적거리다 기력을 잃고 물 속으로 가라앉는 찰라 토르는 부대원을 발견했다. 몇 초만 늦었더라도 그는 그대로 익사했을 게 분명했다. 토르는 부대원에게 다가가 그를 붙잡은 뒤, 두 사람 모두 수면 위로 고개를 들어 숨을 쉴 수 있도록 한쪽 팔로 뒤에서 그의 쇄골을 감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가까이에서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려 주변을 돌아보니 놀랍게도 크론이 보였다. 크론이 토르를 쫓아 바다 속으로 따라 들어온 게 분명했다. 작은 표범은 토르 옆에서 칭얼거리며 열심히 헤엄을 쳤다. 토르는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을 쫓아온 크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 손에는 부대원을 붙잡고 한 손은 헤엄을 쳐나가야 했기에 크론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붉은 소용도리가 치는 물살이 험했고 괴상한 생물체들이 토르 주변에서 수면 위로 몸을 내밀었다 이내 사라졌지만 토르는 주변 환경에 최대한 마음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4개의 다리와 두 개의 대가리를 가진 흉악한 생김새의 보라 빛 바다괴물이 토르 가까이에서 모습을 보이며 쉭쉭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에 토르는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토르의 시선은 20미터 거리에 있는 보트를 향했다. 한 손에는 부대원을 이끈 채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맹목적으로 헤엄쳤다. 부대원은 온 몸을 마구 뒤틀며 소리를 질러댔고 이에 토르는 두 사람 모두 그대로 물 속에 잠겨버릴 지도 몰라 불안했다. “가만히 좀 있어!” 토르는 부대원이 잠잠해지길 간절히 바라며 거칠게 소리질렀다. 마침내 부대원이 잠잠해지자 토르는 잠시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내 바로 옆에서 커다란 물살이 일어나는 소리에 토르는 고개를 돌렸다. 또 다른 바다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네 개의 촉수를 지닌 작은 노란색 생명체였다. 대가리가 사각형인 모습이 눈에 뛰었다. 바다 괴물은 토르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돌진했다. 대가리가 각지지만 않았다면 바다에 사는 방울뱀이라 착각했을 정도로 모습이 흡사했다. 근접하는 바다 괴물을 보며 토르는 몸을 감쌌다. 그러나 바다 괴물이 자신을 물 거란 예상과 달리 바다 괴물은 아가리를 크게 열어 토르에게 바닷물을 쏟아냈다. 토르는 물살에 감겼던 눈을 뜨며 시야를 확보했다. 바다 괴물은 그렇게 토르 주변을 에워싸고 이리저리 헤엄쳤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 토르는 더욱 사력을 다해 헤엄쳐나갔다. 진전이 보였다. 토르는 보트에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때마침 또 다른 바다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얇고 긴 주황빛을 띠는 형상에 아가리에는 날카로운 두 개의 송곳니가 나 있었고 12개의 작은 다리가 뻗어있는 생명체로, 뒤로는 기다란 꼬리를 사방으로 휘감고 있었다. 마치 정면으로 서있는 바다가재 모습을 닮아 있었다. 바다 괴물은 물 곤충처럼 물가를 따라 토르 가까이 다가와 몸을 돌리며 꼬리를 휘저었다. 꼬리가 토르의 한쪽 팔을 스치며 토르의 팔을 휘갈겼고 그와 동시에 꼬리에 붙은 촉수가 토르의 팔을 그대로 파고들어 토르는 커다란 고통을 토로했다. 바다 괴물은 계속해서 앞뒤로 이동하며 쉬지 않고 토르를 찔러댔다. 토르는 당장이라도 검을 꺼내 공격하고 싶었으나 움직일 수 있는 손은 한 손뿐이었고 할 수 있는 건 그 손으로 헤엄을 치는 것뿐이었다. 토르 옆에서 헤엄치던 크론이 바다 괴물을 향해 으르렁거렸다. 크론이 털을 바짝 세우고 용감하게 바다 괴물을 향해 달려들자 위협을 느낀 바다괴물은 물 속으로 종적을 감췄다. 토르는 겨우 한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바다 괴물은 크론을 피해 반대편에서 토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크론은 바다 괴물을 향해 방향을 바꿔 헤엄쳤고 이를 잔뜩 드러내고 잡으려 했지만 번번히 실패했다. 토르는 죽기살기로 헤엄쳤다. 바다 속에서 빠져 나오는 것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마침내 영원 같던 시간이 지났고 토르는 보트에 도착했다. 파도에 맞서 보트는 이리저리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보트 위에는 나이가 많은 부대원 두 명이 타고 있었다. 기존에 토르 또는 토르 일행과 일면이 없던 부대원들이었다. 그들은 토르를 돕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두 부대원은 자신들의 재량에 따라 몸을 앞으로 내밀어 토르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넸다. 토르는 물에 빠졌던 부대원을 먼저 구출했다. 보트 위의 부대원들은 물에 빠졌던 부대원의 팔을 잡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이내 토르는 크론에게 팔을 뻗어 크론의 배를 들어 물 밖 보트 위로 크론을 던져 올렸다. 크론은 네 발로 나무로 만든 보트의 표면을 긁어 마찰 소리를 내며 미끄러짐을 막았다. 크론의 털에서 물방울이 떨어졌고 크론은 몸을 흔들어 물기를 털어냈다. 젖어있는 나무 보트 위에서 잠시 미끄러지는 듯 했지만 이내 중심을 잡았다. 크론은 곧장 보트 가장자리로 달려가 토르를 찾았다. 크론은 바다를 바라보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토르는 나이 많은 부대원 한 명의 손을 잡았다. 부대원이 토르를 끌어 올리던 찰라, 토르는 한쪽 발목과 허벅지에 단단한 근육이 감기는 느낌을 받았다. 뒤돌아 아래를 살핀 토르는 심장이 멎을 뻔했다. 연노란 푸른 빛의 오징어 형태를 한 바다 괴물이 토르의 다리를 촉수로 단단히 감고 있었다. 살 속으로 촉수가 파고드는 순간 토르는 고통의 신음소리를 질렀다. 신속히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목숨이 날아갈 상황이었다. 토르는 허리에 찬 단검을 뽑아 몸을 구부려 촉수에 내리꽂았다. 그러나 단단하고 두꺼운 촉수를 단검으로 찌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토르의 행동에 바다괴물은 더욱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수면 위로 무시무시한 모습을 드러냈다. 초록빛 형상에 눈이 없었고 기다란 목 위로 커다란 두 개의 하관을 벌려 토르를 향해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토르는 다리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무슨 수를 강구해야 했다. 나이 많은 두 명의 부대원들이 사력을 다해 토르를 끌어올렸지만, 토르는 점점 미끄러져 토르의 몸이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크론은 쉼 없이 소리를 질렀고 털을 바짝 세운 채 금방이라도 바다 속으로 뛰어들 기세로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나 설사 크론이 뛰어들어 공격한다 하더라도 바다 괴물에게는 소용이 없을 게 분명했다. 나이 많은 부대원 한 명이 앞으로 몸을 빼고 크게 외쳤다” “몸을 피해!” 이에 토르는 몸을 숙였고, 나이 많은 부대원들을 물 속의 바다 괴물을 향해 창을 던졌다. 창은 빠르게 날아갔지만 목표물을 놓쳤다. 부대원들이 던진 화살은 바다 괴물에 아무런 타격을 가하지 못하고 물 속으로 가라앉을 뿐이었다. 바다 괴물을 창으로 공격하기엔 바다 괴물의 움직임이 굉장히 날렵했고 또 형체가 너무 가늘었다. 순간 크론이 보트에서 뛰어올라 물 속으로 몸을 날렸다. 크론은 바다 괴물 위에 안착해 날카로운 이빨로 바다 괴물의 목덜미를 공격했다. 크론은 바다 괴물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바다 괴물의 목덜미에 이빨을 단단히 고정했다. 그러나 모든 게 계란으로 바위치기에 불과했다. 바다 괴물의 피부는 상상도 못할 만큼 질기고 단단했다. 바다 괴물은 이리저리 몸을 흔들며 크론을 멀리 날려버렸다. 그러는 동시에 토르의 허벅지를 계속해서 단단히 조였다. 벗어날 수 없는 덫에 다리가 끼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더 이상 숨을 쉬기가 고통스러웠다. 다리를 감싼 촉수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고 이내 다리가 잘려나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최후의 수단으로 토르는 자신을 끝까지 붙잡고 있던 나이 많은 부대원을 손을 놓고 허리에 찼던 작은 단검을 빼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토르는 단검을 빼내자 마자 손에서 놓쳐버렸다. 순간 채 놀라기도 전에 이미 토르의 얼굴은 바닷물 속에 잠겨버렸다. 토르는 보트에서 멀어져 바닷속으로 끌려들어갔다. 바다 괴물이 토르를 보트 반대편으로 빠르게 끌고 들어갔다. 토르는 속절없이 보트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의 눈앞에는 시야에서 멀어져 가는 보트의 형상만이 아른거렸다. 이후 토르가 기억할 수 있었던 건 바다 속 깊숙이 끌려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토르는 불의 바다 깊숙한 곳으로 끝도 없이 빠져 들어갔다. 제9장 그웬돌린 공주는 활짝 펼쳐진 들판 위를 뛰었다. 공주의 곁에는 그녀의 아버지, 맥길 왕이 함께였다. 어린 시절의 공주였다. 공주는 10살쯤 되어 보였고, 그만큼 맥길 왕도 젊어 보였다. 맥길 왕의 턱수염이 짧았고 흰머리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젊어 보였고 피부에는 주름 없이 광채가 났다. 맥길 왕은 근심 없이 행복해 보였다. 그웬돌린 공주의 손을 잡고 공주와 함께 벌판을 뛰며 거침없이 웃었다. 공주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공주가 알던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다. 맥길 왕은 그웬돌린 공주를 번쩍 들고 그의 어깨에 공주를 앉힌 뒤 계속해서 빙글빙글 돌았다. 맥길 왕은 더욱 크게 웃었고 그웬돌린 공주는 정신 없이 깔깔거렸다. 아버지의 어깨에 앉은 공주는 안락하고 편안했다. 이 순간이 계속되어 멈추지 않길 바랬다. 그러나 맥길 왕이 그웬 공주를 다시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순식간에 눈부시게 빛나던 태양은 사라지고 땅거미가 내려 앉았다. 그웬 공주의 두 발이 바닥에 닿자, 들판의 꽃들이 자취를 감췄고 공주의 발목까지 진흙이 덮였다. 몇 발자국 옆에 있던 맥길 왕은 하늘을 정면으로 보며 진흙 위에 곧게 누웠다. 방금 전과 달리 아주 많이 늙은 모습이었고 그렇게 진흙 바닥에 고정되어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누워있음에도 맥길 왕의 머리 위에 놓인 왕관은 빛을 반짝였다. “그웬돌린,” 맥길 왕이 힘겹게 말을 뱉었다. “나의 딸. 나를 도와다오.” 맥길 왕은 진흙더미 속에서 한 손을 위로 뻗고 절실히 공주를 찾았다. 공주는 황급히 아버지를 돕기 위해 서둘렀다. 아버지에게 달려가 손을 잡아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발은 그대로 그 자리에 묶여 있었다. 발 밑을 보니 진흙 속에서 공주의 발이 꼼짝 없이 고정됐고 진흙은 순식간에 말라붙어 갈라졌다. 공주는 헤어나오기 위해 계속해서 발버둥쳤다. 그웬 공주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떠보니 왕실의 난간에서 왕국을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무언가가 달랐다. 왕국은 예전과 달리 화려함과 축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고 무질서한 묘지와 같은 모습이었다. 아름다움과 화려함을 자랑했던 왕국의 모습이 사라지고 이제는 저 끝까지 묘지일 뿐이었다. 공주는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뒤를 돌아본 공주는 검은 망토를 뒤집어 쓴 암살자가 다가오는 모습에 그대로 멈춰 버렸다. 암살자는 그녀에게 달려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던 후드를 벗어 던졌다. 일그러진 그의 얼굴은 한쪽 눈이 없었고 이리저리 난 눈가의 흉터가 인상 깊었다. 그는 으르렁 거리며 한 손을 들어 번쩍이는 단검을 높이 쳐들었다. 단검의 칼끝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암살자의 움직임이 너무나 민첩해 공주는 제대로 숨지도 못했다. 공주는 이제 곧 죽게 되리란 생각에 몸을 잔뜩 웅크렸고 암살자는 있는 힘껏 단검을 내리 꽂았다. 그러나 순간 암살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공주가 눈을 뜨고 위를 바라보니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맥길 왕은 시체의 형태로 나타나 공중에서 암살자의 팔목을 쥐어 잡고 있었다. 맥길 왕이 잡고 있던 손을 비틀어 끝내 암살자는 단검을 떨어뜨렸고, 맥길 왕은 암살자를 어깨에 들춰 메고 난간 밖으로 던져버렸다. 그웬 공주는 허공으로 떨어지며 비명을 지르는 암살자의 절규를 들었다. 맥길 왕은 공주에게 몸을 돌려 공주를 지그시 바라봤다. 한 손으로는 부드럽고 단단하게 공주의 어깨를 짚고 있었지만 맥길 왕의 표정이 단호했다. “네가 여기 있으면 위험하단다,” 맥길 왕이 경고했다. “여긴 안전하지 않아!” 맥길 왕이 고함쳤다. 공주의 어깨를 짚고 있던 맥길 왕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 공주는 아픔을 호소했다. 그웬 공주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공주는 침대에서 허리를 세우고 상반신을 일으켰고 암살자를 찾기 위해 자신의 침실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그러나 침실 안은 침묵만이 흐를 뿐이었다. 깊은 적막이 새벽을 말해주고 있었다. 공주는 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쉬었다. 공주는 잠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서 일어나 침실 안을 걸었다. 서둘러 작은 석조 대야로 걸음을 옮겨 계속해서 찬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그리고는 벽에 몸을 기댔다. 공주는 그렇게 더운 여름 새벽 날, 차가운 석조 바닥에 맨발을 디디고 발 끝에서 전해지는 시원함을 온전히 느꼈다. 공주는 애써 정신을 추슬렀다. 현실보다 더욱 현실 같은 꿈이었다.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아버지로부터의 경고가 분명했다. 메시지였다. 공주는 순간 지금 당장 왕실을 떠나야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절대 다시는 돌아와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왕실을 떠나는 건 그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공주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정신을 차리기로 했다. 그러나 공주가 눈을 감을 때마다 아버지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아무래도 아버지가 경고를 보내오는 게 분명했다. 혼란스러운 꿈을 잊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공주는 창 밖으로 첫 번째 태양의 일출을 바라봤다. 이내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맑게 해줄 유일한 장소, 왕의 강을 떠올렸다. 공주는 그곳에 가야만 했다. * 그웬돌린 공주는 얼음처럼 차가운 왕의 강물 속에 숨을 참고 몸을 구부려 계속해서 얼굴을 적셨다. 공주는 어린 시절 발견한 바위 사이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천연 풀장 같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상부에 위치한 산 속의 샘에 가려져 쉽게 찾을 수 없는 곳이었다. 공주는 물 속으로 머리를 밀어넣었다. 차가운 강물의 물살이 공주의 머리칼을 흔들며 냉기를 뼈 속까지 전달했다. 차디찬 강물이 그녀의 알몸을 정화해주는 느낌이었다. 이 외딴 곳을 발견한 건 오래 전이었다. 높은 산 속 나무 사이에 가리워진 이곳은 작은 고원으로, 강물의 물살이 정체되어 깊고 맑은 작은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공주의 머리 위로는 강물이 작은 폭포처럼 쏟아졌고 그렇게 쏟아진 강물은 계속해서 흐르다 이 고원에서 고이며 약한 물살을 일으켰다. 호수는 깊었지만 호수를 담고 있는 바위는 부드러웠다. 쉽게 노출되지 않는 아늑한 장소였기에 걱정 없이 알몸으로 몸을 담갔다. 공주는 여름이 되면 매일 아침 해가 뜰 무렵 이곳을 찾아 마음을 가다듬었다. 특히 오늘같이 꿈자리가 사나운 날에는 더욱 서둘러 이곳으로 발길을 서둘렀다. 꿈이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인지 또는 경고인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일까? 공주의 어지러운 마음이 만들어낸 허상인지 또는 정말 대비를 하도록 찬스를 주려는 건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그웬돌린 공주는 따뜻한 여름 아침 공기를 마시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주변에서 나무 위의 새들이 짹짹거렸다. 공주는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바위에 기댔다. 얼굴을 제외한 몸은 여전히 물 속에 담그고 튀어나온 바위 위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공주는 양 손으로 얼굴에 물을 적셨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길고 긴 머리카락을 쓸었다. 강물의 표면 위로 하늘이 반사됐다. 두 번째 태양이 이미 하늘 위로 솟고 있었고 강물 위로 뻗은 나무들 사이로 공주의 얼굴이 비쳤다. 흔들리는 강물의 표면 위로 공주의 두 눈이 푸른빛으로 빛났다. 공주는 자신의 모습에서 아버지를 느꼈다. 공주는 고개를 돌려 다시 꿈에 대해 생각했다. 공주는 아버지의 암살자가 있는, 첩자들이 가득한, 음모가 들끓는 왕실에 머무는 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개리스 오빠가 왕으로 있는 왕실이었다. 개리스 오빠는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늘 앙심을 품고 피해망상에 젖어있었다. 또한 그 누구보다 질투와 시기심이 강했다. 그는 모두를 적으로 여겼으며 특히 그웬 공주에겐 더욱 적개심을 품었다. 그 어떤 일이 공주에게 일어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공주는 자신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누구도 안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도망갈 인물이 아니었다. 공주는 아버지를 암살한 자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만약 그가 개리스 오빠라면, 더더욱 오빠가 법의 심판을 받을 때까지 도망칠 수 없었다. 공주는 아버지를 해한 암살자가 잡히기 전까지 아버지가 편히 눈을 감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한 평생 정의를 구호처럼 언급했었다. 그리고 아버지야말로 세상 그 모든 사람들보다 죽음 앞에 정의를 밝힐 자격이 충분했다. 그웬 공주는 고드프리 오빠와 함께 만났던 스태픈을 다시 떠올렸다. 분명 그는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나 도대체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공주는 때가 되면 그가 스스로 말을 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끝내 말을 하지 않는다면? 공주는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의 암살자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이제 무엇을 해야 할 지 막막했다. 공주는 마침내 물 밖으로 나와 알몸으로 바위에 올라갔다. 아침 바람에 몸이 떨렸다. 공주는 커다란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늘 그래왔든 손을 뻗어 나뭇가지에 걸어둔 수건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봐도 수건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공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공주는 나무 뒤에서 물에 젖은 알몸으로 그 자리에 황당하게 서있었다. 분명 언제나 그래왔듯 같은 자리에 수건을 걸어 두었었다. 당황한 공주는 추위에 떨며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던 순간 공주는 머리 뒤로 인기척을 느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흐릿한 움직임이 느껴졌고 그와 동시에 자신의 뒤에 한 남자가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심장이 철커덩 내려앉았다. 찰나의 순간에 모든 일이 벌어졌다. 한 순간에 꿈속에서처럼 검은 망토를 입은 사내가 공주의 뒤에 다가섰다. 그는 공주를 뒤에서 붙들었고 공주가 소리를 지르지 못하도록 앙상한 손으로 공주의 입을 막았다. 공주는 사내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사내는 더욱 가까이 공주를 조여왔고, 공주는 꿈에서 봤던 그대로 칼끝이 붉게 빛나는 단검을 쥐고 있는 그의 모습을 포착했다. 결국 그녀의 꿈은 경고였다. 칼끝이 공주의 목을 겨눴다. 칼끝을 겨눈 손에 굉장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공주가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칼 끝에 그대로 목이 베어 나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숨을 쉬기 위해 애를 쓰는 공주의 두 눈가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공주는 스스로에게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너무 어리석었다. 좀 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어야 했다. “내 얼굴을 알아보겠나?”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가 앞으로 바짝 다가오자 그에게서 뜨겁고 역겨운 구취가 전해졌다. 그의 얼굴을 살핀 공주는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꿈속에서 본 그 남자였다. 한쪽 눈이 없고 흉터를 지닌 바로 그 남자였다. “알겠어,” 공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공주에게 너무나 익숙한 인물이었다. 그의 이름을 알진 못했지만 공주는 그가 집행자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하층민인 그는 개리스 오빠가 어렸을 때부터 어울리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개리스 오빠의 심복이었다. 개리스 오빠는 누구든지 겁을 주거나 고문을 하거나 죽이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를 보냈다. “당신은 내 오빠가 부리는 개야,” 공주가 공격적으로 사내에게 비아냥거렸다. 사내는 미소를 지었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치아가 몇 개 빠져있었다. “난 그분의 심복이지,” 사내가 대답했다. “네가 나의 경고를 잊지 않도록 무기를 함께 가지고 왔지. 폐하께서 원하시는 건 네가 더 이상 파헤치지 않는 것이다. 이제 네가 더욱 잘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네게 이 경고를 끝내는 동시에 너의 반반한 얼굴에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칼자국이 새겨져 있을 테니 말이다.” 사내는 으르렁 거리며 칼을 높이 들어 공주의 얼굴을 향해 내리 꽂았다. “안돼!” 공주가 몸서리를 치며 비명을 외쳤다. 공주는 난도질을 피하기 위해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칼끝이 공주의 얼굴에 닿기 전에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어딘가에서 새의 울음 소리가 들렸고 하늘에서 새 한 마리가 사내를 향해 순식간에 하강했다. 공주는 찰나의 순간에 새의 정체를 확인했다: 에스토펠레스였다. 에스토펠레스는 발톱을 세우고 빠르게 날아와 사내의 얼굴을 할퀴었다. 덕분에 사내는 손에서 단검을 놓쳤다. 그웬 공주의 뺨에 단검이 꽂힌 순간이었다. 칼끝이 공주의 뺨을 뚫으려던 순간 칼끝의 방향이 바뀌었다.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단검을 놓쳤고 양 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웬 공주는 그 순간 하늘에서 반짝이는 하얀 빛을 목격했다. 나뭇가지 위로 태양이 반짝이며 에스토펠레스가 날아갔다. 그 순간 공주는 깨달았다. 아버지가 에스토펠레스를 보냈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공주는 지체하지 않았다. 공주는 뛰어 올라 상체를 뒤로 젖히고 호신술 스승이 알려준 그대로 맨발로 정확하고도 강력하게 사내의 명치를 가격했다. 사내는 그대로 몸을 구부렸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공주의 가격에 고통스러워 했다. 공주는 어렸을 때부터 반복 훈련을 통해 호신술을 몸에 익혔다. 공격자를 물리치기 위해 그만큼 힘이 셀 필요는 없었다. 다만 그녀의 가장 강한 허벅지 근육을 사용하기만 하면 됐다. 그리고 정확히 가격하기만 하면 됐다. 사내가 그대로 서서 웅크리고 있는 그 때 공주는 앞으로 다가가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 쥐고 다시 한번 정확하게 조준한 뒤 무릎으로 사내의 코를 가격했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사내의 코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나왔고 그 바람에 공주의 다리에도 피가 튀었다. 사내는 바닥에 꼬꾸라졌다. 공주는 사내의 코뼈를 부러뜨렸다. 뒷일을 대비해 사내를 여기서 끝장내야 했다. 단검을 쥐고 그의 심장에 꽂아야 했다. 그러나 공주는 어서 옷을 챙겨 입고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가 죽어 마땅하긴 하지만 공주는 자신의 손에 직접 그의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공주는 검을 주워 강물에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옷을 온 몸에 감아 알몸을 가렸다. 이 곳에서 벗어날 준비를 마치고는 떠나기 전 다시 돌아가 마무리를 지었다. 공주는 있는 힘껏 그의 사타구니를 발로 가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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